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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9화 (39/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39화

프레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엘리아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엘리아스가 자존심을 이렇게 금방 굽히다니 의외였다.

물론 여전히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지만, 지금 꽤 다급한 상황일 것이다.

그러니 하수인처럼 부리는 제롬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찾아온 거겠지.

프레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직접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요, 그레나딘 대공 전하.”

엘리아스의 시선이 곧 프레사가 아닌 리카온에게로 움직였다.

하지만 리카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프레사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리카온이 대놓고 무시하자 엘리아스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갈무리하더니 성큼 프레사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아무래도 편지 쪼가리보다는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찾아왔다.”

상황을 지켜보던 제드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엘리아스를 견제했다.

덩치 큰 제드의 그림자가 엘리아스 쪽으로 기울어지자 엘리아스가 움찔하며 멈추어 섰다.

“들어가서 얘기하고 싶은데. 너와 나, 우리 남매 둘이서.”

“음. 남매요?”

프레사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엘리아스의 입으로 처음 듣는 표현에 반응한 것이다.

엘리아스 소프에게 프레사는 동생이라기보다 한심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수준이었다.

그에게 동생은 제롬과 에이미뿐이었을 텐데 갑자기 동생 대접이라니.

프레사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 내가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하도 무시하길래 어디에서 주워온 건 아닌지 생각했었거든요.”

“……과거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가해자들은 왜 자신들의 악행을 늘 과거일 뿐이라고 말할까.

프레사에게는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말이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인간은 정말 이기적이었다.

애초에 사과를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엘리아스는 제롬보다 더 최악이었다.

제롬은 멍청하기만 하지, 엘리아스는 오만하고 비열하기까지 했다.

‘분명 손을 벌리러 온 거면서 콧대는 여전하네.’

프레사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할애하는 것마저 손해였다.

프레사가 침묵하자 엘리아스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재차 말했다.

“계속 이 흙바닥 위에 세워 둘 건가?”

“아. 뭐, 차라도 드릴까요?”

“당연한…….”

“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저는 당신과 할 얘기가 없습니다. 가문이 폭삭 망하기 직전이라서 찾아온 거잖아요. 저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시간을 내요?”

프레사가 빙긋 웃으며 단호하게 엘리아스의 말을 잘랐다.

엘리아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이만 돌아가라고요. 이제 저녁 식사 시간이거든요.”

“지금 무슨…….”

엘리아스가 완연히 표정을 구기며 프레사를 쏘아보았다.

소프 백작과 정말 닮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잠시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요. 저는 소프 가문을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프레사는 이제 거짓으로라도 웃지 않았다.

한 톨의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은 건조한 시선으로 엘리아스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엘리아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냉대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자존심 상해할 거면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설마 아직도 프레사가 가족들을 무서워할 줄 알았던 건가?

프레사는 짤막이 혀를 찼다.

그것을 어떠한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리카온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더 하실 말씀이 없다고 하시잖습니까, 소프 백작 영식.”

“…….”

“무력을 행사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쪽은 호위 기사도 한 명 없이 초라한 행색이고.”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리카온이 정곡을 찌르자 엘리아스가 나직이 반박했다.

고고한 척하고 있었지만, 엘리아스는 제대로 된 호위조차 없이 혼자 배에 올라 여기까지 왔다.

길레스피 백작이 지원을 거부했으니 남은 선택지는 프레사뿐일 텐데 그다지 간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프레사가 원했던 전개는 아니었다.

하지만 뭐, 어차피 별 상관은 없었다.

엘리아스 소프가 무릎 꿇고 비는 광경은 웬만해서는 보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자존심을 세우다가 쫄딱 망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앞으로 알게 될 것이다.

“후회할 거다, 프레사.”

“네, 후회 많이 할게요. 멀리는 안 나가요.”

프레사는 다정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엘리아스가 그 가벼운 손짓에 시선을 두더니 이를 꽉 물었다.

얼마나 세게 악물었는지 갸름한 턱선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정말 후회할 거다.”

“몰랐겠지만 저는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해요.”

“네 동생 에이미는 아직 어린애다. 가문이 잘못된다면…….”

“아, 에이미는 잘 지내요?”

프레사가 에이미에게 관심을 보이자 엘리아스의 눈빛이 일순간 빛났다.

그럼 그렇지, 싶은 표정이었다.

“에이미를 만나고 싶다면 소프 가문으로 돌아와, 프레사. 다들 너를 용서할 거다.”

“저기요. 누가 만나고 싶대요? 그 건방진 게 얼마나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서요.”

“……뭐?”

엘리아스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프레사가 가족들을 그리워할 리가 없는데 왜 다들 그걸 모르지?

프레사는 슬슬 피곤해졌다.

가뜩이나 면접 일로 생각할 것이 많은데 엘리아스의 헛소리를 듣고 있자니 관자놀이가 쿡쿡 쑤셨다.

프레사는 마치 잡상인을 내쫓듯 오른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무릎 꿇고 부탁할 게 아니라면 돌아가요.”

“무릎…… 지금 무릎이라고…….”

“사장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네요. 잘 가요, 소프 백작 영식.”

엘리아스가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떠는데 리카온이 프레사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

제드가 그 옆에 선 덕분에 단단한 벽이 프레사를 보호하는 기분이었다.

프레사는 지겨운 엘리아스의 빨간 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조금 편안해졌다.

차마 리카온과 제드에게 대들 수는 없었는지 엘리아스가 등을 돌리더니 마차에 올라탔다.

곧 뿌연 먼지와 함께 마차가 멀어졌다.

“소프 백작 영식이 파로 마을을 빠져나가는지 확인해, 제드.”

“예, 알겠습니다.”

제드는 리카온의 명령을 듣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리카온이 프레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아직 자존심이 남아 있다는 게 놀랍네요. 그렇게 소중한 가문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한가.”

프레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무릎 꿇는 엘리아스 소프를 못 봤으니 내심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리카온이 프레사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나뭇잎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게 얼마나 갈지 모르죠.”

“경매가 언제라고 했죠?”

리카온은 나뭇잎을 프레사의 손에 쥐여주고서 대답했다.

“2주 뒤라고 하더군요.”

“길레스피 백작이 도와주지 않는 한 소프 저택은 경매에 넘어갈 거예요.”

손바닥에 놓인 푸른 나뭇잎을 내려다본 프레사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다른 방식을 계획했었는데 아무래도 바꾸는 편이 나을 듯했다.

소프 가문이 아직도 저렇게 당당히 나온다면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리카온은 굳이 말을 걸지 않고 프레사가 생각을 끝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곧 프레사가 푸르른 눈동자 가득 리카온을 담으며 말문을 열었다.

“리카온 씨, 그 경매에 참석해야겠어요.”

“그럴 줄 알고 미리 표를 준비해 뒀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에 프레사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한참 후에야 물었다.

“……제가 가겠다고 할 줄 아셨어요?”

“물론이죠. 옆에서 지켜본 시간이 얼만데.”

“몇 개월 안 됐거든요.”

“저에게는 긴 시간입니다. 심지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을 줄도 몰랐으니까.”

작게 속삭인 리카온이 손가락 끝으로 프레사의 손바닥 안에 놓인 나뭇잎을 톡 건드렸다.

동시에 나뭇잎이 프레사의 눈동자처럼 새파랗게 물들었다.

“제 남은 시간은 당신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레사.”

“……그 정도는 아니에요.”

프레사는 괜히 민망해져서 시선을 슬쩍 피했다.

고작 용독 한번 해독해 준 것뿐인데 이런 과한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반응에 리카온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준비해야 할 일이 꽤 많겠네요. 화려하고 완벽한 결말을 원하잖습니까, 당신은.”

리카온은 프레사의 속내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씩 미소 지었다.

프레사는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새로운 직원도 채용했으니 그 정도 시간은 날 거예요.”

“누구로 결정했습니까?”

“그건 아직 비밀이에요. 출근하는 날 알게 되는 편이 재밌을 테니까요.”

프레사는 리카온이 준 나뭇잎을 장난스럽게 흔들며 씩 웃었다.

아직 고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결정이 나기는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새로운 직원이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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