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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0화 (40/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0화

로완 길레스피는 프레사와 그레나딘 대공의 다정한 모습을 떠올리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면서도 악몽에 시달렸고 깨고 나서도 종일 그 생각뿐이었다.

사랑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고작 그 짧은 시간 동안 만난 남자와 약혼이라니.

프레사 소프의 장점이라면 거머리처럼 끈질긴 성격과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소프 가문 특유의 촌스러운 붉은 머리카락도 아닌, 신비로운 보랏빛 머리칼과 맑고 푸른 눈동자가 로완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러나 그 모습은 곧 그레나딘 대공과 팔짱을 낀 채 연회장을 빠져나가던 장면으로 바뀌었다.

‘젠장.’

로완은 앨리샤와 며칠 내내 떨어져 지냈는데도 앨리샤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오직 프레사에 대한 분노와 갈망뿐이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왜 이제야 떠오르는 걸까.

프레사가 죽고 나서 느낀 허전함도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사람의 죽음이 새삼스러워서라고 여겼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갑자기 프레사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달았다.

앨리샤가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주 오랫동안 오직 로완을 위해 존재했던 프레사의 애정이 그리웠다.

로완은 이른 새벽부터 깨어 있었으나, 아침 해가 떠오르고 나서야 간신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파로 마을에서 프레사와 다시 만난 후부터 시작된 불면증이었다.

로완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씻고 나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빵을 질긴 가죽처럼 질겅질겅 씹으면서도 멍하니 프레사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프레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역시 걸리는 문제는 앨리샤와 그레나딘 대공이었다.

앨리샤와 요란하게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혼한다면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히 좋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프레사가 그레나딘 대공과 약혼한 사이라는 소식이 왕국은 물론 제국까지 퍼졌다.

이래저래 곤란해진 로완이 생각을 멈추고 빵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냥 파로 마을에서 바로 데려왔어야 했었나.

앨리샤의 반발이야 있었겠지만, 앨리샤는 로완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편이었으니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앨리샤.

그 이름을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아.”

원래 계획은 앨리샤를 계속 백작 부인으로 두고, 프레사를 따로 첩으로 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앨리샤를 설득하기도 전에 프레사가 나타나는 바람에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게다가 앨리샤가 지나치게 울고 화를 내서 도무지 대화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으로써는 누구를 포기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어떻게 앨리샤를 잘 구슬려서 백작 부인 자리를 지키도록 하고, 변치 않는 연애는 프레사와…….

“로완.”

그때 노크도 없이 침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앨리샤가 나타났다.

로완은 다 식은 고기 수프를 내려다보다 말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앨리샤, 무슨 일이지?”

로완의 반응은 의도치 않게 싸늘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앨리샤의 얼굴을 보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앨리샤는 로완의 차가운 반응에 멈칫했으나 곧 침착한 표정으로 문을 달고 들어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은 채 말문을 열었다.

“며칠 내내 고민해 봤는데…… 당신을 이해하기로 했어요.”

“이해?”

“당신에게도 이유가 있었던 거잖아요. 제가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상황 판단이 느렸나 봐요.”

앨리샤는 그렇게 말하며 힐끔 로완의 눈치를 살폈다.

속에도 없는 말을 하려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로완이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곧 다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앨리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이 다소 풀어진 상태였다.

“그걸 지금이라도 알아차리다니 다행이야, 앨리샤.”

“백작 부인으로서 제가 아직 부족한가 봐요. 좀 더 어른스럽게 굴었어야 했는데.”

“뭘. 당신은 지금도 충분해. 얌전하게만 굴면.”

로완이 미소 지으며 앨리샤 옆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리고 앨리샤의 머리카락 위에 짤막이 입을 맞추더니 뻔뻔한 말을 늘어놓았다.

“귀족들은 원래 본처와 애인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아, 앨리샤. 그런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물론 내가 그러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날 화를 많이 내길래.”

“……네, 저는 당신을 믿어요.”

앨리샤는 로완의 입으로 직접 이런 말을 들으니 정신이 혼미했다.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고? 거짓말쟁이.’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서 대답했더니 속이 뒤집혀 토기가 올라왔다.

애써 미소 지은 채 로완을 응시하던 앨리샤는 조만간 다시 소프 가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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