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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1화 (41/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1화

설마 좌표가 잘못된 건가?

프레사는 혹시 리카온이 다른 곳에 도착한 건 아닌가 싶어 골목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밝은 햇볕과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왕국의 수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거리였다.

프레사가 아이작에게 부탁한 스크롤 좌표는 칸체르 제국의 수도, 그중에서도 제도였다.

2주 후에 있을 소프 저택 경매에 참여하려면 준비가 필요한 탓이었다.

프레사는 새로운 옷과 장신구 등 최대한 화려한 모습으로 치장해 소프 가문 사람들 앞에 나타날 생각이었다.

사실 왕국으로 가도 됐지만, 요란하게 부활을 알리는 바람에 시선이 집중되어 곤란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리카온이 어떤 곳에서 살아 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일이 틀어질 줄이야.

‘설마 경매장으로 간 건 아니겠지.’

편의를 위해서 경매장 근처의 스크롤도 미리 준비했는데, 리카온에게 잘못 전달한 건 아닐까.

일단 스크롤마다 좌표가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아이작의 말을 떠올리며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이 인파 속에서 리카온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막막해졌다.

프레사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잠깐 멈추어 있다가 골목을 위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골목을 좌표로 설정했다고 했으니 다른 골목일 수도 있어.’

그러나 여러 골목을 살펴보았으나 리카온은 없었다.

어쩌면 리카온도 프레사를 찾아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

‘곤란하네.’

프레사는 챙겨온 가죽 가방을 뒤적여 지도를 꺼냈다.

미리 스크롤의 좌표 그대로 위치를 기록해 두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제도 근처의 상권이구나. 이쪽에 디저트 카페가 있고 저쪽으로 가면 황성……. 황성 쪽으로 가 볼까. 아니, 리카온 씨라면 거기는 가지 않았을 거야.’

애초에 리카온에게 말했던 계획이 부티크에 들르는 거였으므로 그곳에 있을 확률이 더 높았다.

프레사는 부티크가 줄지어 자리한 거리를 확인한 후 지도를 접어 넣었다.

‘이 골목이 지름길이야.’

바로 옆 골목을 가로질러서 가면 부티크였는데, 골목 분위기가 영 우중충했다.

하지만 리카온과 엇갈리지 않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프레사는 크게 심호흡한 후 골목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다른 골목보다 유난히 어둡고 습한 골목이었다.

‘꼭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던데…….’

프레사는 후드를 조금 더 깊숙이 당겨서 얼굴을 바짝 가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골목 중간쯤 지나가는데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아 당겼다.

“이봐.”

마치 쇠로 목을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였다.

프레사는 자연스럽게 팔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해서 불가능했다.

무슨 짓이냐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내는 건 상대를 자극할 뿐이었으므로 침묵을 유지했다.

“말 못 해?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남자가 잔뜩 화가 나서 프레사의 후드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술 냄새.’

남자에게서는 지독한 술 냄새와 시궁창에서 며칠 동안 구른 듯한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 되는데.’

프레사는 망토 소매 속에 넣어둔 단검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소프 가문에서 지낼 때 아무도 모르게 꾸준히 단검술을 연습했다.

체력을 길러야만 독약을 삼키고도 몸이 버텨줄 거라 여겨서였다.

그러니 사실 이 정도 남자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아직 왕국 출신의 프레사가 여기에서 사고를 친다면 곤란해진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실랑이를 벌이기에는 리카온을 찾는 게 더 급했다.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엉?”

이 무슨 삼류 연극 같은 대사를 주절거리는 건지.

프레사는 입속에서 잘게 혀를 차며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의외로 체격이 꽤 건장했지만,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여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단검 손잡이로 목을 누르면…….’

결정을 내린 프레사가 망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단검을 꺼내려는 그때, 번쩍 빛이 나더니 남자의 눈이 새하얗게 뒤집혔다.

그리고 쿵, 거대한 남자의 체구가 단번에 뒤로 넘어갔다.

남자는 꼭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전신을 잘게 경련했다.

“참 한결같은 곳이라서 부끄럽네요.”

언제 왔는지 리카온이 표정 없는 얼굴로 술주정뱅이를 힐끔 쳐다보더니 곧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낯선 이의 손길이 닿았던 프레사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듯 쥐곤 닦아냈다.

프레사는 전혀 놀라지 않은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리카온 씨, 어디에 도착했던 거예요?”

“반대쪽 골목이었습니다. 이래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만든 스크롤은 쓰지 않아야 하는 건데. 다치지는 않았어요?”

리카온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가라앉아 있었다.

프레사는 그가 화났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같은 좌표일 줄 알았는데 조금 어긋난 스크롤이었나 봐요.”

“……당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빨리 당신을 찾지 못해서 이런 일을 겪게 한 게 짜증 날 뿐입니다.”

리카온이 옅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수건을 아예 프레사의 손목에 둘둘 묶어버렸다.

“하여튼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네. 딱 봐도 위험한 골목이잖아요. 여길 들어오면 어떡해요.”

“그렇지만 이쪽으로 가면 바로 부티크가 나오니까요. 조금이라도 빨리 리카온 씨를 만나는 게 목표였어요.”

프레사는 침착하게 대꾸하며 리카온이 감아 준 손수건을 매만졌다.

이 정도 남자쯤은 쓰러트릴 수 있다고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으나 말한다고 해서 리카온이 믿지도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대신 얼른 리카온의 팔을 붙잡아 부티크 쪽으로 잡아끌었다.

“기분 풀어요. 저 멀쩡하잖아요. 그리고 전 당신 생각처럼 연약한 귀족 아가씨가 아니라고요. 부티크부터 들렀다가 디저트 카페도 가요. 이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가 있다던데, 궁금하거든요.”

프레사가 들뜬 말투로 쉬지 않고 주절거리자, 리카온은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프레사는 몇 걸음 걷다 말고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 죽은 건가요?”

리카온에게 향해 있던 프레사의 눈동자가 골목에 쓰러진 술주정뱅이에게로 향했다.

이제 입에서 거품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는데 천벌을 받아 죽은 것처럼 보였다.

리카온이 프레사의 시야를 자연스럽게 가리며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죽지는 않을 겁니다. 운 좋게 누가 발견해서 도움을 준다면.”

“……음.”

이 골목은 딱 봐도 멀쩡한 사람이 드나들지 않을 것 같으니, 죽을 확률이 높다는 뜻인 듯했다.

하지만 프레사는 저런 부류의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성격이 아니었다.

제 덩치만 믿고 약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 이하의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프레사는 별다른 말 없이 다시 부티크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으려면 역시 살아 있지 않은 게 좋겠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쉬운 길인 것 같아요.”

프레사는 방긋 미소 짓고서 골목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리카온이 뒤이어 그림자를 벗어나 모습을 드러냈다.

프레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프레사는 리카온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때마침 지나가는 경비대를 불러 세웠다.

“골목에 수상한 사람이 쓰러져 있어서요.”

경비대는 프레사의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냥 내버려 두면 좋았을 텐데.”

리카온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프레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그 남자 주머니에 제 보석을 하나 넣었어요. 골목에서 사람이나 위협하는 인간에게 과분한 물건이죠. 아마 당분간은 감옥에서 지낼 거예요.”

경비대는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딱 봐도 하루 이틀 골목에서 타인을 괴롭힌 게 아닌 것 같았으니, 분명 누군가에게서 보석을 훔쳤다고 생각할 테니까.

리카온은 프레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이해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프레사가 더 빨랐다.

“대충 찝찝한 일은 해결했으니 이제 즐거운 기분으로 쇼핑할까요?”

리카온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눈으로 프레사를 응시했지만, 곧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목적은 그거였잖습니까. 가요.”

“사실 제 목적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디저트 카페인데도요.”

가볍게 되받아친 프레사는 여전히 리카온의 손가락 끝을 가볍게 잡고서, 고급스러운 간판이 걸린 부티크로 걸어갔다.

프레사는 부티크 안으로 들어서기 전 망토를 벗어서 들었다.

“누군가와 옷을 사러 오는 건 처음이라서 조금 긴장되네요.”

“보통 귀족들은 재단사를 저택으로 부르니까요.”

소프 저택에도 수시로 유명한 재단사가 드나들었었다.

프레사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모두 그 재단사가 손수 지은 옷을 입곤 했다.

프레사에게는 눈이 침침해 잘 보이지도 않는 노파가 얼기설기 만든 옷이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에이미가 늘 알게 모르게 엉망으로 만들어서 로렌이 직접 바느질해 준 적이 많았다.

프레사는 흘러간 과거를 잠시 떠올렸으나 금세 지워내며 말했다.

“파로 마을이 외진 곳만 아니었어도 재단사를 불렀을 텐데, 그건 조금 아쉽네요.”

“부티크에서 직접 입어 보거나 새로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여긴 꽤 유명한 곳이니까.”

리카온이 프레사의 손을 살짝 붙잡더니 자연스럽게 부티크의 문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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