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2화
엘리아스는 프레사에게 받은 수치스러움에 치를 떨며 소프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레나딘 대공의 호위 기사는 엘리아스가 정말 파로 마을을 떠나는지 감시까지 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으나 대공이 떡 버티고 서 있으니 프레사에게 해야 할 말조차 하지 못했다.
“젠장!”
엘리아스는 파로 마을에 다녀온 후부터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오빠, 프레사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앨리샤를 잘 꼬드겨 보는 게 어때? 솔직히 그게 낫잖아! 프레사가 도와준다고 해도 자존심 상하지 않아?”
“제발 좀 닥쳐, 에이미.”
에이미는 옆에서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을 내뱉어서 괜히 엘리아스의 분노만 샀다.
제롬은 눈치껏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제롬은 세 남매 중에서 살아 돌아온 프레사와 가장 많이 만났다.
프레사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 유일한 사람인 셈이었다.
‘프레사가 우리를 도울 리가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은행에 일정 대금을 치르지 못하면 소프 저택은 2주 후 경매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겨울의 검을 제롬이 내다 팔지만 않았어도 잠시 숨통을 틀 수는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엘리아스가 그 사실까지 알게 되면 제롬은 저택이 낙찰되기도 전에 쫓겨날 것이다.
‘제기랄, 어떻게 하지.’
제롬은 손톱만 물어뜯으며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 보려고 애썼다.
앨리샤가 찾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엘리아스의 집무실에 도착한 앨리샤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엘리아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둘이서요.”
앨리샤가 눈치를 주자 제롬과 에이미는 그녀와 눈을 맞춰 인사하고 서둘러 집무실을 떠났다.
엘리아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길레스피 백작이 마음을 바꿨습니까?”
몸매가 드러나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앨리샤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럼 왜 찾아온 겁니까?”
엘리아스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앨리샤가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누군가 마시고 남긴 찻잔을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프레사가 도움을 거절했나 보네요. 그렇죠?”
“…….”
“제가 좋은 방법을 생각했거든요. 로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지만, 대신 프레사의 마음은 바꿀 수 있을 완벽한 방법이요.”
엘리아스가 그제야 앨리샤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방법입니까?”
“프레사와 친밀하게 지냈던 로렌이라는 하녀가 아직 저택에서 일하고 있나요?”
엘리아스는 잊고 지냈던 이름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런 이름의 사용인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 하녀는 왜…….”
“이용하세요.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돕게 해야죠.”
앨리샤는 다시 입매를 끌어 올려 은은한 미소를 내보였다.
로완이 프레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프레사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될 것이다.
로완은 프레사가 죽었다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데에서 잠깐 흥미를 느낄 뿐일 테니까.
지금이야 작은 마을에서 약방이니, 사업이니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소프 저택에 속한 프레사는 멋대로 굴지 못할 것이다.
로완은 늘 프레사의 주눅 든 모습을 보며 한심하다고 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나마 남아 있던 동정심마저 사라진다며 투덜거렸던 목소리가 선명했다.
‘그러니 사업이 더 커지기 전에 틀어막아야 해.’
앨리샤가 생각한 방법은 로렌이라는 사용인을 이용해 프레사를 협박한 다음, 돈을 뜯어내 소프 저택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소프 저택을 되찾으려면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프레사가 지금껏 얼마를 벌었든 쉽게 갚기 힘들 것이다.
‘그레나딘 대공이 변수이긴 하지만, 대공이 정말 프레사를 특별히 여길 리 없지.’
아마 대공도 프레사가 추락하면 자연스럽게 떠나게 될 것이다.
애초에 제국의 대공이 왜 프레사의 약혼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다 한때일 뿐일 터였다.
앨리샤는 제 속내를 꽁꽁 감춘 채 엘리아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분명 프레사는 받아들일 거예요. 로렌과 각별한 사이였거든요.”
이윽고 잠시 고민하던 엘리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앨리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쁘지 않은 방법 같군요. 고맙습니다, 앨리샤.”
“별말씀을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잖아요. 어떻게든 돕고 싶을 뿐인걸요.”
앨리샤는 그렇게 말하며 다정하고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엘리아스가 그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윽고 미미하게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