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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3화 (43/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3화

리카온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 없이 여자를 응시했다.

얼떨결에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멈추어 선 프레사는 리카온을 올려다보았다.

“리…….”

프레사가 입술을 여는 순간, 리카온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레사, 먼저 약방에 돌아가요. 곧 갈 테니까.”

아무래도 지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인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갔다.

‘누구일까?’

일단 평범한 아가씨는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후드를 뒤집어써서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알아보기 힘들었을 리카온을 단번에 알아본 걸 보면…….

‘가까운 사이.’

아마 여러 번 만난 적 있고 분위기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지낸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얼핏 스치듯 확인한 리카온의 눈동자는 사뭇 곤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은 사이가 소원해졌다거나 다른 이유로 껄끄러워졌다거나, 어쨌든 그런 관계일지도.

‘돌아오면 얘기해 주겠지.’

프레사는 호기심을 접어두고 카페 건물 옆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짐을 리카온 씨가 다 들고 있잖아.’

좀 나눠 들었어야 했는데…….

짐을 들고 대화를 나누기는 조금 불편하지 않으려나.

하지만 이제 와 돌아가기도 애매했으므로 프레사는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올 때와 비슷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래도 두 번째라서 처음처럼 어지럽거나 이상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시야가 휙휙 바뀌고 곧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저녁노을로 붉게 물든 약방의 텃밭 앞이었다.

프레사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흐트러진 시야를 바로잡았다.

그때 눈앞에 불쑥 새하얀 솜뭉치가 튀어 올랐다.

「다녀왔느냐, 레사야.」

“리스 님, 약방은 별일 없었나요?”

「신입이 영 어리숙하더구나. 약병을 몇 개나 깼다.」

리스가 혀를 쯧쯧 차며 아이작의 험담을 줄줄 늘어놓았다.

이럴 때마다 정말 나이 든 노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프레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첫날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저도 그런 실수는 많이 했었어요.”

「그 인간이 양심은 있어서 돈이라도 안 받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그래서, 제국은 잘 다녀왔고? 걱정이 있는 얼굴이구나.」

프레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리스의 말에 멈칫했다.

“……티가 나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리스가 포르르 날아오더니 프레사의 어깨에 자리 잡고 앉았다.

프레사는 현관문을 달칵 걸어 잠그고 조용하고 어둑한 약방 내부를 바라보았다.

제드와 아이작이 퇴근하고 난 뒤라서 공허했다.

좋아하는 약초 냄새와 눈에 익은 풍경이었으나 프레사는 어쩐지 이 정적이 조금 쓸쓸해졌다.

하지만 리스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는 않아 괜히 여기저기 살펴보는 척 담담히 대답했다.

“별일은 아닌데…… 리카온 씨가 누군가를 만났거든요. 곤란해 보여서 그냥 먼저 오기는 했는데 걱정되어서요.”

「굳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만.」

“하지만 아직 용독도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고, 허약하잖아요. 회복하려면 1년 이상은 걸릴 거예요. 약도 꾸준히 챙겨 먹어야 하고…….”

프레사는 저도 모르게 줄줄 늘어놓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리스의 말처럼 리카온은 굳이 프레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그는 제국의 대공이고 막대한 부를 지녔으며 가장 거대한 마탑의 주인이기까지 하니까.

「그 인간을 아끼는구나.」

리스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중얼거렸지만, 프레사에게는 아니었다.

리카온을 사람 대 사람으로 좋아하기야 했다.

하지만 소중한 존재라는 건 조금 다른 의미였으니까.

리카온은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인 걸까?

프레사는 허술하게 진열된 박하수 병을 빤히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잖아요.”

「흠. 내가 말한 건 그 뜻이 아닌…….」

쾅쾅.

리스가 반박하려는 듯 말문을 열었으나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묻혔다.

프레사는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사, 나예요.”

리카온의 목소리였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멍한 표정을 갈무리하고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리카온 씨!”

“미안합니다. 같이 돌아오지 못해서. 이거.”

리카온은 프레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과부터 하더니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개인적인 사정이잖아요.”

프레사는 종이가방을 건네받고서 빙긋 미소 지었다.

리카온은 잠시 말없이 프레사를 응시하다가 약방 내부로 시선을 옮겼다.

“별일은 없었습니까?”

“네, 케이드 씨가 약병을 몇 개 깼다는 것만 빼면요.”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네.”

“리카온 씨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나는 약병을 깨지 않았습니다.”

리카온이 한쪽 눈썹을 틀어 올리더니 불퉁하게 되받아쳤다.

하지만 프레사는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에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어쨌든 이제 준비는 거의 끝났네요. 오늘 같이 가 줘서 고마워요, 리카온 씨.”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당신이야말로 고생했습니다.”

리카온의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프레사를 담았다.

그곳에는 계절을 잊은 듯 피어난 라일락이 담겨 있는 듯했다.

프레사는 사실 리카온에 대해 아직 잘 몰랐다.

하지만 굳이 리카온에게 설명을 바라고 싶지도 않았다.

애매하고 설명하기 복잡한 감정을 추스른 프레사는 그저 리카온이 저를 보는 시선이 조금 간지럽다고 느꼈다.

프레사는 잠자코 그를 마주 보고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럼 내일 뵐게요, 리카온 씨.”

“……아무것도 묻지 않네요.”

도리어 그 말을 먼저 꺼낸 건 리카온 쪽이었다.

리카온은 프레사가 아까 만난 그 여자에 대해 궁금해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다시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지금 말하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아뇨.”

리카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더니 현관문을 닫았다.

「나는 잠시 지하에 다녀오마.」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리스가 헛기침하더니 돌연 지하로 모습을 감추었다.

곧 이곳은 두 사람의 공간이 되었다.

노을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둑어둑한 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리카온은 프레사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바란다면 무엇이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솔직히 당신이 궁금해하기를 바랐으니까.”

리카온이 바짝 다가선 바람에 프레사의 시야는 온통 그였다.

평소에는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지던 그가 지금은 어째서인지 다소 어색했다.

그러나 리카온의 말을 듣고 나니 모르는 척 외면했던 호기심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도 되나요?”

“네, 그러기 위해서 왔는데.”

리카온이 픽 웃더니 머뭇거리지 않고 재차 말문을 열었다.

“아까 그 여자는 내 형, 그러니까 칸체르 황제의 약혼자입니다. 그래서 나를 알아봤던 거고.”

아.

프레사는 저도 모르게 드는 안도감에 흠칫 놀라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한 거야.’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쥐구멍이 있다면 머리를 들이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곧 침착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군요. 곤란한 일에 휘말렸을까 봐 걱정했어요.”

“뭐, 곤란한 일이긴 했죠. 사전에 연락도 없이 제도에 나타났으니.”

“……미안해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 제국의 귀족들은 좀 재수가 없어서 나를 가만히 놔두지 못하거든요.”

리카온의 말투는 가벼웠으나 프레사는 그 속뜻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어딜 가나 귀족들은 다 비슷비슷한 모양이었다.

특히 이름 좀 알린 고위 귀족일수록.

로완과 소프 가문의 사람들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프레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대화는 잘 마무리하셨어요?”

“네, 뭐. 황제 폐하께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은 했습니다.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되고.”

리카온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투였다.

그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프레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더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실래요? 계속 세워 둔 게 신경 쓰이네요.”

“사실 다리 아파서 죽을 뻔했습니다. 지금은 퇴근했으니 손님인데 손님을 계속 세워 두다니, 서운합니다. 무슨 차로 마실래요?”

리카온이 드물게 앓는 소리를 내며 저벅저벅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분명 프레사가 차를 대접하겠다고 했는데도 그가 준비해 가져다줄 심산이었다.

프레사는 괜찮다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저는 재스민차로 부탁드려요.”

“앉아서 기다려요. 금방 준비해 갈게요.”

곧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프레사는 잠자코 서서 리카온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은은한 불빛이 두 사람의 장소를 아늑하게 채웠다.

차를 우리는 손길과 찻잔에 잠기는 물소리, 작게 달그락거리는 식기의 소음.

곧 향긋한 차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어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불청객이 문을 두드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프레사! 프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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