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5화
아가씨가 마법사였나?
로렌은 눈을 크게 뜨며 여유로운 프레사를 얼떨떨하게 쳐다보았다.
“부, 부활하시면서 마법사가 되신 거예요?”
로렌이 더듬더듬 간신히 던진 질문을 듣자마자 프레사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 아하하, 그럴 리가. 도움을 좀 받았어. 그나저나 괜찮아?”
“네, 전 괜찮은데…….”
“다, 당장 비켜!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던 에이미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일으키더니 프레사를 밀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닿기 전에 프레사가 먼저 엎어진 엘리아스를 잘근잘근 밟으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꺅!”
졸지에 헛손질한 에이미가 균형을 잃고서 다시 앞으로 고꾸라졌다.
공교롭게도 그 앞은 엘리아스가 엎어진 위치였고, 에이미는 그 위로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프레사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두 남매를 돌아보았다.
“아, 미안. 하필 그 자리에 서 있을 줄 몰랐네. 엘리아스 오라버니, 괜찮아요?”
“…….”
“턱이 잘못 돌아갔나? 의원을 불러야겠는걸, 에이미.”
프레사는 엘리아스가 자존심이 상해 대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잘게 혀를 찼다.
“미안해, 오빠!”
에이미가 허둥지둥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추켜올리며 일어났다.
엘리아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프레사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프레사는 방긋 미소 지으며 엘리아스를 마주 보았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나 봐요.”
“이게 무슨, 건방진 짓이지?”
엘리아스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하지만 프레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감정이었다.
프레사 소프로 살아오는 동안 프레사는 이들이 전혀 두렵지 않았으니까.
두려운 척하느라 꽤 애를 먹기야 했지만, 정해진 운명에 따를 뿐이라고 생각하면 견딜만했다.
오로지 정해진 결말만을 위해 참아야 했다.
하지만 결국 또 이렇게 엮였으나 이번에야말로 원작의 개연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가만히 있는 프레사를 먼저 건드린 것은 이들이었으므로.
프레사는 팔짱을 꼬고서 엘리아스를 빤히 응시했다.
“먼저 제 사람을 건드린 건 당신들이잖아요. 전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뿐이고요.”
“하, 네 가족은 우리라는 것을 잊었나? 소프 가문이 지금 위태로운데 고작 하녀 한 명 때문에 감히……!”
“가족? 당신과 내가 가족으로 묶이는 건 좀 늦은 감이 있잖아.”
그때 저벅저벅 계단을 밟는 누군가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사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리아스와 에이미 그리고 로렌은 동시에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새카만 제복 차림의 리카온이 자연스럽게 프레사 옆에 서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또 좌표가 틀렸나 보네요. 하마터면 쓰레기통에 처박힐 뻔했습니다.”
“그레나딘 대공…….”
엘리아스가 잇새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리카온이 함께 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프레사는 리카온을 마주 올려다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케이드 씨에게 다른 거래처를 알아보라고 해야 할까 봐요. 스크롤이 영 시원찮네요.”
“역시 그 인간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앞으로는 그냥 내가 마법을 쓰든, 스크롤을 만들든 하겠습니다.”
“리카온 씨는 아직 더 쉬어야 한다니까요.”
“과보호.”
“직원이자 환자 관리.”
프레사와 리카온은 이 자리에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투덕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에이미가 겁을 집어먹었는지 엘리아스의 뒤에 바짝 붙었다.
“오, 오빠…….”
엘리아스는 힐끔 에이미를 돌아보고서 다시 프레사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기며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분명 혼자 오라고 했을 텐데.”
“혼자 왔잖아요? 리카온 씨는 따로 왔으니까.”
프레사가 얄밉게 되받아쳤다.
혼자 오라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리카온이 이후에 나타났기에 사실 같이 온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엘리아스는 프레사의 말장난이 불쾌한 표정이었으나 마지못해 침착함을 유지했다.
“……뭐, 이 정도 무례는 용서해 주겠다. 이 자리에 왔다는 건 내 제안에 응하겠다는 뜻일 테니.”
엘리아스는 리카온에게 예의조차 갖추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프레사는 엘리아스가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만만하니까 리카온 씨까지 얕잡아 보는 거야.’
프레사의 곁에 있기에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프레사는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들은 이런 사람들이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테니까.
굳이 가르쳐줘 봤자 입만 아플 뿐이었다.
말보다는 역시 돈과 힘이 통하는 그런 사람들.
프레사는 한참이나 엘리아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사뭇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일단 급한 저택 경매부터 막아야…… 뭐?”
엘리아스가 잘못 들었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역시나 그는 프레사가 이 말도 안 되고 허접한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나 보다.
프레사는 여전히 팔짱을 꼰 상태로 턱만 살짝 치켜들었다.
‘어떻게 이런 멍청이가 있을까.’
사실 소프 가문의 사람들이 세간에서 하는 평가와는 달리 죄다 어딘가 부족하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가문인 것 같지만, 사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원작의 전개를 따르지 않으면 며칠씩 앓아야 했으므로 프레사는 참고 견뎠다.
생각해 보면 원작의 안전장치는 이 모자라고 인성까지 파탄 난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던 것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완결이 나자마자 이런 꼴이 될 리가 없었으니.
반드시 흘러가야 할 운명의 힘이란 프레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모양이었다.
“우리를 돕지 않겠다는 거야?”
잠시 상념에 사로잡힌 프레사를 향해 에이미가 소리쳤다.
프레사는 고개를 살짝 틀어 그녀를 직시했다.
에이미는 여전히 엘리아스의 팔을 꽉 붙잡고 프레사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아직 어린애라서 그런지 위압감은커녕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그 속에 어떤 악마가 자리 잡고 있는지 알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프레사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며 대꾸했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잖아. 협박했을 뿐이지.”
“가족이라면 당연히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돈도 많이 벌었다면서! 이대로 소프 가문이 망했으면 좋겠어?”
에이미는 프레사가 말을 받아주자 조금 용기가 났는지 언성을 높였다.
속내를 조금도 감추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이 험한 사교계에서 살아남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감탄한 프레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부드러운 미소를 내비쳤다.
“그래.”
“……뭐, 뭐라고?”
에이미가 커다란 눈을 빠르게 여러 번 깜빡였다.
프레사는 리카온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리카온은 줄곧 프레사를 보고 있었는지 곧장 눈을 마주 응시했다.
리카온은 프레사와 일종의 약속을 한 상태였기에 엘리아스와 에이미에게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프레사를 혼자 보낼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함께 오기야 했지만, 어쨌든 리카온은 제국의 사람이었으므로 왕국 내에서 괜한 분쟁에 휘말리게 둘 수 없었다.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은 사람인데 타국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은 여러모로 약점 잡힐 위험이 컸다.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얌전히 있겠습니다.”
리카온은 프레사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눈매를 깊숙이 휘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마주 웃어 준 프레사가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여전히 놀란 얼굴의 로렌이 프레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프레사는 그녀를 향해 안심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더는 이 칙칙한 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으니 슬슬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었다.
프레사는 다시 엘리아스 쪽으로 시선을 움직이고서 산뜻하게 내뱉었다.
“당신들이 망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 돌아온 거니까.”
“무슨 헛소리를…….”
묵묵히 프레사를 쏘아보던 엘리아스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너는 우리 가문이 무너져도 아무렇지 않단 말인가?”
프레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좁은 감옥 내부에 그녀의 말간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메아리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프레사!”
엘리아스가 마치 소프 백작처럼 엄하게 프레사의 이름을 외쳤다.
프레사는 그제야 천천히 웃음을 멈추고 엘리아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를 한 번이라도 가족으로 취급해 주지 않았으면서, 정작 돈이 필요해지니 ‘우리’라고 하는구나. 양심이 없는 사람들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 심하네.”
“…….”
“오, 오빠…….”
프레사의 싸늘한 말에 엘리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에이미는 엘리아스 옆에 붙어서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보챌 뿐이었다.
“조용히 있어, 에이미.”
엘리아스가 차가운 눈으로 에이미를 내려다보더니 곧 거칠게 팔을 떼어냈다.
“어차피 감옥 열쇠는 이곳에 없다. 어떻게 할 거지? 이 철창은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 텐데. 돈을 주고 저 하녀를 데려가지 않는다면 노예로 넘길 거다.”
엘리아스는 턱을 치켜들며 거만한 투로 내뱉었다.
확실히 소프 백작 가문의 지하 감옥은 마력이 통하지 않는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프레사가 아무 대책도 없이 찾아올 줄 알았던 걸까?
정말 소프 백작과 백작 부인의 품 안에서 소중하게 사랑받으며 자란 맏이다웠다.
프레사는 늘 뒤에서 그런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고, 언제나 홀로 외로워했다.
소설 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쓸쓸함과 사랑받지 못하는 감정까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한편으로는 원작의 프레사가 안쓰러웠다.
소설 외부에서 독자로 읽을 때는 주인공들의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니, 그저 프레사 소프가 멍청하고 일차원적인 악역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남자 주인공을 너무 사랑해서 가족들의 명예를 짓밟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을 시기 질투해 하찮은 계략이나 펼치는 허술한 악역.
어쩌면 프레사가 이 소설 속에 다시 태어난 것은 그런 프레사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독자가 한 명이라도 존재하기를 바라서가 아닐까?
그게 누구든지 말이다.
프레사는 고요한 푸른 눈으로 엘리아스와 에이미를 느긋하게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망토 소매에서 붉은색 액체가 담긴 시약병을 꺼내 들며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애초에 열쇠는 필요하지도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