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47화
프레사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던 계획이 처참히 실패한 후 앨리샤는 엘리아스의 연락을 외면했다.
엘리아스는 다시 한번 길레스피 백작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로완 역시 그가 만나자는 요청을 무시할 뿐이었다.
아버지와 가까이 지냈던 귀족들을 살펴봤으나 대부분 소프 백작에게 사기를 당한 귀족들이었기에 고소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결국 그렇게 경매 날짜가 다가왔고, 집사를 제외한 모든 사용인이 떠난 저택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소프 남매는 경매장에 참석했다.
사실 이미 소프 저택을 비웠어야 했으나 오갈 곳이 없는 남매와 의식이 없는 소프 백작 부인의 처지를 고려한 왕실이 낙찰 후로부터 열흘까지 여유를 주었다.
유예 기간이 늘어났을 뿐 어쨌든 열흘 후면 남매는 소프 저택을 새 주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아무도 입찰을 하지 않으면 저택은 무사한 거 아니야?”
제롬의 멍청한 발언에 엘리아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헛소리할 거면 입 좀 다물어.”
이미 왕국 법에 따라 경매에 넘어간 저택이 어떻게 무사하단 말인가.
오늘 낙찰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다음 경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엘리아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초조한 마음으로 경매를 지켜보았다.
저택 경매는 큰돈이 오가는 만큼 아마 가장 뒤에 배정되었을 터였다.
유명인의 유품인 목걸이가 접전 끝에 어느 귀부인의 손에 들어갔고, 가난한 화가가 그렸으나 그 진가를 인정받은 그림이 비싼 값에 낙찰되었다.
경매장 분위기는 돈 좀 굴린다는 귀족들과 부자들의 참여로 금세 과열되었다.
엘리아스는 경매가 진행될수록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한껏 찌푸린 그의 인상이 그 기분을 대변했다.
“저기, 프레사 아니야?”
한창 경매가 진행되는데 제롬이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안 하고 중얼거렸다.
엘리아스와 에이미가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앞쪽, 부유한 고객들만 앉을 수 있다는 특별석에 프레사가 앉아 있었다.
“젠장.”
엘리아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프레사의 곁에는 그레나딘 대공과 지난번 엘리아스를 위협했던 기사까지 함께였다.
‘소프 저택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는 꼴을 보려고 온 건가?’
보는 눈만 없었다면 당장 프레사에게 가서 그 건방진 낯짝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프레사가 소프 저택에서 지낼 때처럼.
하지만 지금 프레사 소프는 예전의 그 어리숙한 동생이 아니었다.
‘그때 그 약……. 그런 걸 또 갖고 왔다면 곤란하니까.’
게다가 그레나딘 대공과 기사까지 대동했으니 호위 기사 한 명 없는 엘리아스가 여러모로 불리했다.
엘리아스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겨우 경매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프 저택이 경매에 올랐다.
“다음 경매품은 오랜 세월 동안 아름다움을 유지하여 고고하게 우뚝 선 소프 저택입니다! 5천 티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5천 티콘이라니.
사실 경매에 넘어온 저택은 거의 이 정도 금액으로 시작하지만, 엘리아스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될 만큼 적은 금액이었다.
수도 내에서 소프 저택만큼 아름다운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소프 가문의 입지가 바닥으로 치닫다 보니 여론을 생각해 경매가가 최저 금액으로 측정된 모양이었다.
엘리아스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자존심이 상했고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귀족들은 이미 본인 소유의 저택이 있었고, 굳이 두 저택을 오가며 관리하는 데에 돈을 들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경매 물품을 소개한 경매 진행자가 소프 저택의 전경을 그린 그림을 들어 올렸다.
귀족 몇 명이 팻말을 들어 올리며 본격적으로 입찰을 시작했다.
“12번 6천! 13번 7천! 56번 8천! 12번 9천!”
그래도 몇 명이 꾸준히 입찰 가격을 올리며 경쟁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프레사가 팻말을 들었다.
“3, 33번 2만 티콘!”
갑자기 훅 뛰어오른 가격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소프 저택의 본래 가치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여러 이유로 가치를 잃은 저택을 2만 티콘 이상 주고 거래할 귀족은 없는 모양이었다.
“33번 고객님께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경매사가 낙찰을 알렸고 프레사를 알아본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오빠, 혹시 프레사가 마음을 바꾼 거 아니야?”
“그럼 우리 집에서 나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에이미와 제롬이 연이어 엘리아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엘리아스는 프레사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동생들처럼 미약한 희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냉정하게 굴어 봤자 프레사는 프레사였던 건가.
엘리아스가 침묵하는 그때 프레사 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따라가자, 오빠. 얼른!”
에이미가 벌떡 일어나더니 엘리아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세 남매는 서둘러 프레사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