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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1화 (51/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1화

칸체르의 황성, 리카온이 제 형을 위해 만든 정원 내부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황제 라우렐의 몸은 허공에 떠오른 채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짐승의 소리 같은 낮은 으르렁거림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고, 부릅뜬 두 눈은 괴물처럼 형형했다.

마법으로 라우렐을 구속한 리카온이 저벅저벅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입술 틈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젠장.”

“전하!”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제드가 놀란 얼굴로 외쳤으나, 리카온은 한 손을 들어 그가 더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거기 있어, 제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레사 님의 조언을 잊으셨습니까?”

“알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

리카온의 시선은 여전히 라우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진한 청보라색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띠었다.

폭주하는 라우렐의 마력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리카온이 제 마력을 흘려 넣어 그 연결을 끊어야 했다.

“으윽……!”

그 순간, 잠잠해졌던 라우렐이 바르작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내 마력은 오히려 황제 폐하와 상극이라서 충돌할 뿐이야.”

리카온은 침착한 얼굴이었으나 목소리는 한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시 진정시키기엔 황제 폐하께도 좋지 않으니 이만 재워야겠군.”

리카온은 깨어나기 직전인 라우렐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몇 번이나 시도해야 했다.

손목과 발목을 기이하게 꺾으며 이상한 소리를 내던 라우렐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리카온은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프레사의 경고처럼 그가 마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남은 용독이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망할 용독만 아니었어도 이토록 고전하지는 않았을 터다.

프레사의 약 덕분에 어느 정도 호전되었다고 해도, 드래곤의 독은 지독한 저주로 남아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니 곤란하게 됐어.’

하지만 라우렐이 마력 중독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곤란했기에, 리카온 혼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리카온은 여러 번 깊숙이 호흡을 가다듬은 후 의자에 털썩 앉아서 푹신한 잔디 위에 드러누운 라우렐을 내려다보았다.

가엾은 그의 형제는 언제 이 난리를 피웠느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잠든 상태였다.

리카온은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한숨을 토해냈다.

‘대공 전하, 최근에 황제 폐하를 만나 보신 적 있으십니까?’

프레사와 제국을 방문했던 날, 디저트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오렌 후작 영애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황제 폐하께서 어딘가…… 달라지셨습니다. 지금 폐하께는 대공 전하가 필요해요.’

오렌 후작 영애, 아이리스 오렌은 라우렐의 약혼자였다.

리카온을 제외한 사람 중 라우렐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가 라우렐의 이상을 알리자 리카온은 이를 가볍게 넘기지 않고 곧장 황성으로 돌아와 라우렐을 찾았다.

그리고 예전과 다른 마력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

라우렐은 리카온과 달리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마력이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력을 타고났으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기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갑자기 그 넘치는 마력이 주인인 라우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라우렐은 점점 더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마력이 폭주하면 라우렐은 자아가 사라져 제멋대로 날뛰는 짐승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리카온의 명령 때문에 멀찍이 서 있던 제드가 천천히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레사 님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건…….”

“이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어.”

리카온은 제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딱 잘라 대꾸하곤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프레사의 실력이라면 분명 라우렐의 마력을 잠재우는 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라우렐이 마력 중독 발작을 일으킬 때 증상을 확인해야 할 텐데 너무 위험했다.

물론 리카온이 옆에 있을 테니 큰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타국의 사람인 프레사가 제국 일에 너무 관여하는 것부터 영 내키지 않았다.

리카온은 프레사가 하고 싶은 사업을 하며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랐으므로.

이른 작별을 건네던 날 밤, 프레사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분명 다시 만나게 될 텐데 영원한 이별이라도 한 듯 리카온의 마음이 한없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리카온은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던 프레사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러한 감정을 감히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기에 섣부르게 굴고 싶지는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고스란히 전해 주고 싶었다.

물론 리카온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한참 후가 될 테지만.

리카온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일어나 서며 말했다.

“황제 폐하를 이만 침실로 옮기지.”

“예, 전하.”

제드가 곧장 대답하고 라우렐을 안아 올렸다.

힘없이 축 늘어진 라우렐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리카온은 그의 유일한 형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가, 금세 거두고서 성큼성큼 공간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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