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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2화 (52/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2화

아무래도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장소를 옮긴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테라스 뒤쪽 기둥에 바짝 붙어 숨어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귀를 기울였다.

로완은 테라스 주변을 잠깐 살피더니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착하지 마, 앨리샤. 난 당신의 소유가 아니야.”

“집착이요? 이게 다 누구 탓인데요! 달라진 건 당신이면서 제 탓을 하는 건가요?”

“하.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프레사와 약혼을 깨면서까지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저건 좀 심했다.

앨리샤 역시 프레사와 같은 감정을 느꼈는지 한참 동안 침묵했다.

프레사는 고개를 슬쩍 빼낸 채 앨리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했다.

옆모습인 데다가 거리가 조금 있는 탓인지 정확한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척 실망했으리라 짐작했다.

프레사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곧 앨리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와 결혼한 걸, 후회하는 거예요?”

“그래, 후회해. 당신을 만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테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돌아온 로완의 대답에 앨리샤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로완이 조용해졌다.

“말해 봐요, 로완. 결혼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제가 질린 건가요? 아니면 프레사 때문이에요? 그토록 싫어하던 여자가 다시 살아서 돌아오니 감정이 동했어요?”

“그래. 당신에게는 잠깐 흔들린 거였어. 난 프레사뿐이었던 거야. 내가 어리석었다고. 이제 됐나?”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듣고 있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들이 계속해서 언급하는 사람이 바로 프레사 본인인 탓이었다.

‘저 인간이 미쳤나?’

프레사는 로완이 제대로 미쳤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모시던 아가씨의 약혼자와 바람을 피운 앨리샤 또한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로완은 확실히 어딘가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이혼하자, 앨리샤 루미스.”

로완이 마침내 그 단어를 내뱉었을 때 프레사는 그대로 등을 돌려 테라스를 벗어났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라는 말이 있다.

로완과 앨리샤는 서로에게 딱 맞는 한 쌍이었는데, 갑자기 이혼이라니 이건 쓰레기를 밖으로 내보내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큰일이네.’

두 사람이 정말 이혼하게 될까?

하지만 로완과 앨리샤는 주인공들이었다.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의 바로 그 주인공들.

솔직히 두 사람이 프레사의 뒤통수를 거하게 쳤으니 잘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게 쓰레기를 방사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로완이 정말 앨리샤와 이혼한다면 프레사를 귀찮게 할 거라는 사실은 뻔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둘을 화해시킬 수도 없잖아.’

상상만 해도 이상하고 끔찍했다.

프레사가 터덜터덜 돌아오자 아이작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반겼다.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여왕 폐하께서 참석하셨다고요.”

만약 프레사가 아이작의 동업자가 아닌 길드원이었다면 잔소리를 잔뜩 퍼부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고작 로완과 앨리샤 때문에 하마터면 오늘 목적인 필츠 여왕과의 만남을 놓칠 뻔했으니 그럴 수밖에. 프레사는 재빨리 사과부터 했다.

“아, 미안해요. 그나저나 여왕 폐하는 어디 계세요?”

“저쪽입니다.”

아이작이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프레사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며 사뭇 비장하게 말했다.

“다녀올게요.”

“네. 실수하지 마시고요.”

“아직도 저를 못 믿으세요?”

“사람은 누구나 긴장하면 실수를 합니다.”

마치 보호자처럼 염려하는 아이작의 말에 프레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아이작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넌지시 말했다.

“저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는걸요. 춤이라도 추고 계세요, 케이드 씨.”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되거든요. 저는 알아서 잘합니다.”

아이작의 대답은 조금 뒤늦게 돌아왔다.

무언가 불편했는지 몰라도 그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진 채였다.

프레사는 잠시 그와 눈을 마주 보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늦지 않게 돌아올게요.”

“기다리겠습니다.”

아이작은 별생각 없이 당연한 말을 한 거겠지만, 프레사에게는 어쩐지 기분 좋은 말이었다.

누군가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준다는 것은 언제 겪어도 묘한 기분이었다.

프레사는 드레스를 탁탁 털어서 한번 단장한 후 필츠 여왕이 앉은 자리로 걸어갔다.

여왕은 이 연회를 주최한 사람이자 나라의 주인답게 화려한 붉은색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깔끔하게 위로 말아 올린 머리칼 사이사이에는 보석으로 만든 장식품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이 파티가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여왕의 주변에는 호위 기사 몇 명과 시녀들이 쭉 서 있어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힐끔 쳐다본 후 멈추어 서서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여왕 폐하, 프레사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아, 소프 백작 영애군요.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주어서 무척 고맙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경직된 얼굴로 꼿꼿하게 앉아 있던 필츠 여왕이 누가 봐도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가문이 완전히 파탄 났는데도 프레사는 여전히 소프 백작 영애였다.

‘새로운 성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떨떠름한 감정을 숨긴 프레사는 천천히 필츠 여왕 옆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여왕은 기다렸다는 듯 프레사 쪽으로 살짝 몸을 돌려 앉으며 말했다.

“소프 백작 영애, 유능한 약사라고 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탈모 치료제를 만들었다지요.”

“과찬이십니다, 폐하.”

여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프레사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마도 본론을 꺼낼 모양인 듯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프레사 역시 여왕과 눈을 맞춘 채 잠자코 기다렸다.

“혹시 정식으로 약제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아직 왕국의 약제사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고 들었는데요.”

프레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식 약제사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소프 백작 영애에게 왕립 아카데미에서 약제사 과정을 거친 후 시험을 치를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단순히 사람들과 거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약제사가 되어 일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

하지만 어째서인지 쉽사리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왕은 무엇을 보고 프레사에게 이런 과한 친절을 베푸는 걸까?

너무 좋은 조건이라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소프 백작 영애.”

이럴 줄 알았다.

이 세상에 공짜란 드물거나 없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여왕의 말에 대뜸 시비를 걸 수는 없어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하세요.”

“아카데미 졸업 후 시험에 통과한다면 왕실에서 일해 줬으면 합니다.”

“……왕실 약제사가 되어 달라고 하시는 건가요?”

지금도 왕실 약사는 있을 터였다.

그런데 굳이 프레사에게 부탁하는 이유가 뭘까?

단순히 프레사의 능력만 보고? 능력이 뛰어난 약사는 얼마든지 많았다.

‘물론 탈모 치료제를 개발한 건 처음이기야 하지만.’

프레사의 질문에 필츠 여왕은 조금 망설이는 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서 입을 다물었다.

프레사는 의아함을 억누르고 잠자코 여왕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하여튼 이 계급 사회, 문제가 많다니까.’

프레사는 겉으로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여왕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필츠 여왕은 곧 마음을 다잡았는지 다시 프레사를 마주 응시하며 나직이 대답했다.

“그건 차차 얘기하는 것으로 합시다. 이곳은 아무래도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곳이 아니군요.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겠습니다.”

프레사는 곧장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이곳에는 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많았다.

아무래도 지금 이곳에서 말하기에는 곤란한 사안임은 틀림없었다.

프레사는 풍성한 필츠 여왕의 머리카락을 힐끔 쳐다본 후 일어났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그래요. 부디 이 파티가 그대에게도 즐겁기를 바랍니다.”

필츠 여왕은 여전한 미소를 내보였다.

프레사 또한 마찬가지로 비슷한 종류의 웃음을 지어 보이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연회장 내부에는 흥겨운 음악이 줄곧 흐르는 중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이작이 홀로 서 있었다.

이제 용무가 끝났으니 슬슬 약방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프레사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프레사, 잠시만 얘기 좀 해.”

로완이 한쪽 뺨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조급히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아까 테라스에서 앨리샤에게 한 대 맞은 모양이었다.

맞은 건 잘된 일이지만, 그렇게 맞고도 이렇게 따라오는 건 영 불쾌했다.

프레사는 팔을 세게 빼내서 그의 손을 떨쳐냈다.

“당신과 할 얘기 없다고 했잖아요.”

“무릎이라도 꿇을까? 당신 가족들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던 것처럼 나도 그러기를 바라는 건가?”

“네? 제가 왜요? 전 당신에게 눈곱만큼의 유감도 없는데요?”

프레사가 일부러 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받아치자 로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진심이야?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같은 말 자꾸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저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 적은커녕 인간적인 호감을 느낀 적도 없다니까요.”

“프레사 일부러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이러는 거 다 알아.”

“말이 안 통하네, 정말.”

프레사는 한숨을 내쉬고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프레사, 잠깐만. 프레사!”

로완이 지치지도 않았는지 또 프레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는 그때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윽!”

갑자기 로완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고, 프레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엉망으로 넘어진 로완 옆에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짚고 선 아이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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