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3화 (53/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3화

“이런, 죄송합니다. 제 지팡이가 가끔 말썽이라서.”

아이작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뻔뻔하게 사과를 건넸다.

그리고 로완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어 고의가 아니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고의가 분명했다.

로완이 프레사의 뒤를 끈질기게 쫓아가고 있던 도중 넘어졌으니 말이다.

‘케이드 씨가 나를 도와주려고 한 거야.’

하지만 프레사가 알기로 아이작은 평민 출신이었다.

로완은 귀족, 그것도 왕국에서 10번째 이내에 드는 부유하고 유명한 귀족이었다.

물론 재산 규모만 따졌을 때 아이작이 더 위겠지만, 이 세상은 짜증 나는 계급제 사회였으므로 아이작이 손해를 볼 가능성이 컸다.

다행이라면 하필 딱 맞춰 연주가 끝났고, 사람들이 춤을 멈춘 상태라서 이쪽으로 모든 시선이 집중된 상황이었다.

여기서 로완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자비롭고 온화하다는 그의 평판에 금이 갈 터였다.

프레사는 잠자코 로완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로완 역시 프레사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잔뜩 일그러트렸던 표정을 갈무리하며 아이작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괜찮습니다. 그쪽은 프레사의 파트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길레스피 백작님. 아이작 케이드라고 합니다.”

“케이드라는 가문은 처음 듣는데. 시골 출신입니까?”

로완은 구겨진 옷을 탁탁 털어서 펴며 날카로운 눈으로 아이작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가까이에서 듣지 않는 이상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프레사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로완이 상대를 낮잡아볼 때마다 꺼내는 주제이기도 했다.

출신이 어디인지, 어느 가문 소속인지 그런 우스운 것들.

‘하여튼 치사한 짓은 잘한다니까.’

프레사는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성큼성큼 아이작 옆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만 돌아가요, 케이드 씨.”

“용무는 끝나셨습니까?”

“네. 이제 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요.”

“알겠습니다.”

로완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아이작과 연회장을 빠져나가려는데, 로완이 또 프레사를 불러 세웠다.

“이대로 가면 후회할 거야, 프레사.”

“후회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겠지. 앨리샤한테 맞은 걸로는 부족해?”

프레사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로완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반사적으로 새빨간 본인의 뺨을 손으로 감싼 로완이 곧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렸다.

“……맞다니 누가.”

“저는 뺨만 한 대 치는 걸로 안 끝나요, 백작님. 그러니까 그만 징징거리세요. 바람이나 피울 때는 언제고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

“바람이라니, 무슨 소리야?”

로완이 전혀 모르겠다는 듯, 도리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되받아쳤다.

아, 이 인간은 약혼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한 것이 바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약혼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눈 건 바람이야, 멍청아.”

로완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프레사는 그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아이작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가요, 케이드 씨.”

“그렇게 하죠.”

때마침 새로운 연주가 시작되었다.

젊은 귀족들이 새로운 파트너와 춤을 추기 위해 연회장 중앙으로 모여들었고, 얼떨결에 그들 사이에 끼게 된 로완은 프레사에게 다시 다가올 수 없었다.

프레사는 그제야 안심하고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선선한 저녁 공기에 정신이 맑아졌다.

아직도 로완의 손길이 남아 있는 듯해 찝찝해 손목을 문질러 닦았다.

“소프 저택에 들르실 겁니까?”

아이작은 로완과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고 프레사의 목적지만 간단히 확인했다.

프레사는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연회장 앞에 대기 중인 마차를 응시했다.

드디어 소프 남매들이 저택을 떠났다고 전해 들었다.

벌써 그 일로부터 열흘이 지났다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프레사는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을 열어 열쇠를 확인했다.

연회에 참석하기 전 받아온 것이었다.

어차피 로렌에게 넘겨줄 물건이지만, 오늘은 그 넓고 화려한 저택이 그녀의 소유였다.

“네,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려고요. 케이드 씨는요?”

“저는 길드에 다녀오려고요. 요즘 약방 일이 바빠서 소원한 것 같아서요.”

아이작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하고 지팡이를 도로 접어 겉옷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는데, 지팡이가 종이처럼 접히는 게 제법 신기했다.

‘케이드 씨는 마법 물건을 애용하는구나.’

마법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비싸고 소장 가치가 커서, 구매한다고 해도 직접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본인 재력에 맞게 스스럼없이 물건을 쓰고 있었다.

마법 스크롤이나 크기 조절이 되는 지팡이 같은 것들.

하지만 프레사는 솔직히 마법 스크롤을 써서 이동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야 한두 번쯤 편해서 사용했지만, 영혼이 어디론가 달아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은 영 별로였다.

게다가 미리 좌표를 지정해야 하는데, 스크롤을 구매할 때 미리 좌표를 알려줘야만 했다.

즉 주문 제작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더 비싼 거겠지만.

프레사는 아이작이 스크롤을 꺼내 들 줄 알고 잠시 기다렸다.

그가 떠난 후에 마차를 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이작은 스크롤을 꺼내지 않았다.

그 역시 프레사를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결국 프레사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안 가세요?”

“모셔와야죠.”

“저를요?”

“네. 거기서 주무실 건 아니잖습니까. 아무도 없는 저택에 혼자 가는 건 좀 그렇죠. 좌표가 지정되지 않아 저택까지는 마차로 가야겠지만, 돌아올 때는 스크롤을 사용하면 됩니다.”

아이작이 저벅저벅 마차로 다가가더니 문을 열어 주고, 프레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프레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손을 살짝 붙잡고서 마차에 올랐다.

좀 과한 친절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야 했지만, 오늘 연회 파트너로서 마무리까지 하고 싶은 모양이라고 여기고 그만두었다.

달리는 마차 안은 고요했다.

프레사는 저녁노을이 진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리카온 씨는 잘 지내는 걸까.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다녀오겠다고 했으니 분명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길레스피 백작 때문입니까?”

넌지시 묻는 아이작의 목소리에 프레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작 역시 창밖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어느새 프레사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프레사는 느릿느릿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 인간 생각을 제가 왜 하겠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역시 이런 사교계는 영 별로예요.”

“사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법이죠.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아이작이 이해한다는 투로 대꾸했다.

하긴, 그 역시 길드를 키우느라 꽤 고생했을 터였다.

프레사는 말이 나온 김에 줄곧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케이드 씨는 혼자 길드를 운영하셨나요? 아니면 동업자가 따로 있었나요? 혼자서 이만큼 길드를 성장시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혹 불쾌한 질문이라면 말씀해 주세요. 저도 사업자가 되어 보니 이런저런 궁금한 게 많아졌거든요.”

프레사는 아이작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단어를 골랐다.

그 덕분인지 아이작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곧장 대답했다.

“친구와 함께 시작했었습니다. 중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갈라서긴 했지만. 아무래도 사업이라는 건 좀 복잡하고 힘든 길이죠.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도 힘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당신은 어느 정도 결과를 확신하고 계신 것 같더군요.”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뒤에 이어진 말이 질문이었다면, 네. 저는 확신했어요. 잘될 거라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프레사는 작게 미소 지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확신이었지만, 그런 말까지 붙일 수는 없었으므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후로 약방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는 동안 마차가 소프 저택 앞에 도착했다.

어느새 사방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프레사는 아이작과 함께 저택의 현관문을 열고 안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떠난 저택은 그저 적막에 잠겨 있었다.

불조차 켜지지 않은 탓인지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프레사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 앞에 서서 내부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정말 아무도 없구나.’

프레사가 이곳에서 지낼 때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용인이 밤낮 가리지 않고 바쁘게 오가던 곳이었다.

그런데 고작 몇 개월 만에 이렇게 되다니.

프레사가 구매하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귀족이나 재벌의 소유가 되었을 테지.

한 걸음 뒤쪽에 서 있던 아이작이 프레사의 옆에 서며 물었다.

“썰렁하네요. 들어가 보실 겁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냥, 정말 다들 떠난 게 맞는지 확인차 온 거니까요.”

“그럼 더 늦기 전에 돌아가시죠. 스크롤을 챙겨 왔습니다.”

“네, 그게 좋겠어요.”

프레사는 휑한 내부를 한 번 더 확인한 후 도로 현관문을 걸어 잠갔다.

열쇠가 몇 개나 되어서 묵직한 열쇠 뭉치를 가방에 집어넣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날카로운 것이 날아왔다.

“피하십시오!”

먼저 그것을 알아본 아이작이 지팡이를 꺼내 순식간에 펼치더니 그것을 쳐냈다.

예리한 단검이 지팡이에 부딪혀 날아가더니 소리 내며 바닥을 굴렀다.

“암살자입니다.”

아이작이 어느새 프레사의 앞에 서 있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