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4화
“암살자요?”
“네. 당신을 기다린 모양인데요.”
아이작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긴장이 묻어났다.
프레사는 어두운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검이 날아온 방향을 보면 분명 맞은편 숲이었다.
그곳에서 프레사를 향한 살기가 느껴졌다.
제대로 된 검술이나 마법을 배워 본 적 없는 프레사가 느낄 만큼 진한 기운이었다.
그 점을 알아차리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건가?’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건지 모르겠다.
프레사는 이미 필츠 왕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서 딱히 원한을 살 일도…….
‘없지는 않네.’
소프 백작 가문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트리기야 했다.
그럼 소프 남매들이 암살자를 고용한 건가?
하지만 오늘 프레사가 소프 저택에 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을 텐데, 그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모든 돈을 탈탈 털린 소프 남매들이 그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를 주시하는 다른 누군가일 테고…… 아마 로완이나 앨리샤 정도인데.’
프레사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데 아이작이 재차 말문을 열었다.
“스크롤을 꺼내야 합니다. 하지만…….”
슈욱! 슉!
어디선가 또 단검이 여러 개 날아와 프레사를 노렸다.
아이작은 그새 더 길어진 지팡이로 단검을 쳐내며 말을 이었다.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군요. 그러다 또 단검이 날아오면 막지 못할 테니까요.”
“제가 꺼내 볼까요?”
프레사의 말에 아이작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살자는 분명히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움직이면 저들도 움직일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계속 이렇게 대치할 수는 없어요.”
프레사는 분명히 위험한 상황인데도 도리어 침착했다.
누군가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아이작이 함께 있어서일까.
아이작 역시 이런 일에는 꽤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길드 운영을 하다 보면 아마 위험한 일을 제법 겪었을 테니.’
프레사는 아이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아이작 또한 고민되는 모양인지 잠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둘 다 조용해지자 사방에서 누군가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암살자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탓일 터였다.
‘암살자 같은 건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 여기 소설 속이지.
프레사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며 건조한 입술을 혀로 축였다.
여기서 죽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껏 아등바등 살아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럴 때 리카온 씨가 같이 있었더라면…….’
리스와 리카온을 떠올리는 순간, 프레사의 한쪽 뺨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프레사는 눈꺼풀 아래가 지나치게 밝아지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레사 님, 괜찮으십니까?”
프레사가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감아 버리자 아이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순간, 프레사의 눈앞에 새하얀 망토가 펄럭거리며 날아들었다.
우아하게 내려와 우뚝 선 그것은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프레사의 뺨을 밝히던 불빛이 천천히 수그러들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큰 키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틀어 프레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 장소는…… 꽤 새삼스럽네요.”
“리카온 씨.”
리카온이 어떻게 온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다.
리카온이 나타나자마자 누군가 나무 위에서 빠르게 떨어지더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프레사의 시력으로는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또 귀찮은 일에 휘말렸나 봅니다.”
하지만 리카온은 여유로운 표정 그대로,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고르는 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옵니다!”
아이작이 지팡이를 꽉 움켜쥐고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암살자가 움직이자 스크롤을 꺼낼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크롤을 찢을 필요가 없었다.
리카온이 가볍게 손을 들어 암살자를 겨누고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튕기자,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한 줄기 떨어져 암살자를 강타했다.
“끄아아아악!”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던 암살자가 프레사의 바로 왼쪽 옆에서 괴로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탓에 누구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았으므로 차차 알아봐도 될 터였다.
암살자가 기절한 곳은 조금만 늦었어도 프레사에게 검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다행히 암살자는 한 명뿐이었는지 프레사를 향하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프레사에게 스크롤을 건네려던 아이작이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이란.”
“억울하면 그쪽도 마법사 하든가.”
리카온이 아이작을 힐끔 쳐다보며 되받아치곤 이내 프레사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그리고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 레사.”
“어떻게…… 저한테 추적 장치라도 달아 둔 건가요?”
프레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리카온을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리카온이 마법을 걸어 놓은 약방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놀라웠다.
“혹시 몰라서 당신에게 작은 마법을 걸어 뒀었습니다.”
“아, 그럼 아까 그 빛이…….”
“네. 그거요. 당신이 간절히 나를 부르면 오는 일종의 메신저 마법이랄까.”
리카온이 짓궂은 투로 대답하는 바람에 프레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간절히 부르다니,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리카온이 얄미웠다.
하지만 리카온을 떠올린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서둘러 말을 돌렸다.
“저 암살자를 누가 고용한 건지 알아내야겠어요.”
“몇 시간 후면 깨어날 겁니다. 그나저나 다친 곳은 없어요?”
“네, 멀쩡해요. 아이작 씨가 도와주셨고, 리카온 씨가 제때 와주셨거든요.”
프레사는 어느새 지팡이를 도로 접는 중인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이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느릿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먼저 길드로 돌아가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으니 남아 있을 필요는 없겠죠.”
“아,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하마터면 케이드 씨까지 위험할 뻔했는데…….”
“지난번 제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그 빚을 갚았다고 치십시오. 그럼.”
아이작은 조금 전까지 목숨을 위협받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한 낯이었다.
그는 프레사와 리카온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더니 스크롤을 찢었다.
은은한 빛이 그의 전신을 감싸듯 퍼져나갔고 곧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이작까지 사라지자 소프 저택 앞에는 프레사와 리카온 둘뿐이었다.
프레사는 작은 빛이 되어 흩날리는 마법 스크롤의 흔적을 응시하다가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리카온은 아까부터 줄곧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말했다.
“여길 왜 온 겁니까? 그것도 이렇게 어두운 밤중에.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냥…… 정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사실 아직 믿어지지 않아서요. 그나저나 리카온 씨는 괜찮으세요? 마법을 너무 많이 쓰신 것 같아요. 안색도…….”
프레사가 저도 모르게 리카온의 뺨을 손으로 감싸 쥐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리카온의 안색이 약방을 떠났을 때보다 훨씬 좋지 않아 보였다.
이런 얼굴은 용독을 해독하기 전에나 보았기에 사뭇 걱정스러웠다.
제국에서 무슨 일을 하고 돌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무리했을 것이다.
프레사는 안쓰러운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리카온을 응시했다.
리카온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윽고 프레사의 손 위로 제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이런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장난치지 말아요. 지금 리카온 씨 얼굴을 안 봐서 그래요.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요.”
프레사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좁아졌다.
리카온은 가벼운 태도였지만, 프레사는 그의 속이 얼마나 망가졌을지 짐작이 갔다.
이러다간 남은 용독이 또 활개를 칠 텐데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프레사는 단호한 표정으로 여전히 바닥에 뻗어 있는 시커먼 복장의 암살자를 내려다보았다.
“약방으로 돌아가요. 리카온 씨의 상태도 살피고 암살자의 정체도 밝힐 겸.”
리카온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사는 약방의 좌표가 지정된 마법 스크롤을 두 개 꺼내서 하나는 리카온에게 건넸다.
“당분간 마법 사용을 금지하겠어요. 그러니까 불편하시더라도 이걸 쓰세요.”
“……또 좌표가 잘못되었으면 곤란한데.”
“이번에는 여러 번 확인했으니까 확실할 거예요. 은근슬쩍 마법으로 순간 이동할 생각하지 마세요.”
리카온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프레사가 워낙 완고하게 말하는 바람에 이내 알겠다고 대꾸했다.
먼저 스크롤을 찢으려던 프레사가 암살자를 쳐다보며 멈칫했다.
“그나저나 저건 어떻게 들고 가죠?”
“음. 여기에 넣어 가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리카온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입구를 둘둘 말아 뒀던 끈을 풀자 주머니가 사람 하나 정도 들어갈 만큼의 크기로 늘어났다.
“원래는 짐을 담는 용도로 쓰는 물건이지만, 뭐. 상관없죠.”
리카온이 짧은 설명을 덧붙이곤 암살자를 주머니에 잘 담았다.
프레사는 다소 수상해 보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마법 스크롤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