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5화
약방에 도착하자마자 암살자를 담은 주머니를 지하로 옮겼다.
리카온은 무신경한 손길로 주머니를 바닥에 질질 끌고 갔는데,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퉁, 퉁 하는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일이냐, 레사야.」
“아가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리스와 로렌이 놀라서 지하로 따라 내려오려고 했지만, 프레사는 그들을 막았다.
“차차 설명할 테니까 기다려 줘. 그렇게 할 수 있지?”
로렌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리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거라.」
리스는 순순히 대답하고 포르르 날아서 로렌의 머리 위에 앉았다.
세계수 정령의 폭신한 소파가 된 로렌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네, 알겠어요. 위험한 일은 아니죠?”
“물론이야, 로렌. 금방 끝날 거야.”
프레사는 상냥하게 미소 지은 후 지하실 문을 걸어 잠갔다.
어느새 암살자를 커다란 주머니에서 꺼내 의자에 앉힌 리카온이 프레사를 돌아보았다.
“혹시 굵은 끈 같은 거 있습니까?”
“네, 잠시만요.”
프레사는 재빨리 서랍장을 열어 굵은 밧줄을 찾아 건넸다.
리카온은 암살자의 어깨부터 발까지 꼼꼼하게 밧줄로 묶은 후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겉옷 주머니에서 검은색 장갑을 꺼내 끼면서 말했다.
“시작할까요.”
“잠깐, 리카온 씨. 고문이라도 하시려고요?”
프레사가 리카온과 암살자 사이를 막아섰다.
리카온이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 고문이긴 하지만.”
“……저에게 더 쉬운 방법이 있어요.”
“쉬운 방법?”
리카온이 의아한 눈빛으로 프레사를 응시했다.
프레사는 이미 약방에 도착하기 전부터 생각해 둔 방법이 있었다.
그녀는 리카온과 잠시 마주 보고 있다가 곧 약초를 끓이는 작은 항아리와 여러 재료를 준비하며 말했다.
“진실만 말하게 만드는 시약이 있어요.”
“그런 약을 지금 만들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아니라면 제가 말을 꺼냈을 리 없잖아요.”
프레사는 조제법 책을 펼친 뒤 ‘진실의 입’이라는 약의 조제법을 찾아냈다.
리카온이 슬쩍 책을 쳐다보더니 신기하다는 투로 말했다.
“처음 보는 문자네요. 그걸 읽을 줄 아십니까?”
“……대륙 공용어잖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프레사가 멈칫하며 리카온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리카온은 도리어 의아한 감정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오히려…… 요정의 언어에 가까운데.”
요정의 언어?
프레사는 지금껏 대륙 공용어로 알고 있던 문자가 요정의 문자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요정의 언어를 공부한 적도 없었고, 공부할 수도 없었다.
요정의 문자는 요정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니까.
게다가 지금 그녀가 보는 문자는 분명히 대륙의 공용어와 같은 모양이었다.
프레사의 혼란을 읽었는지 리카온이 넌지시 덧붙였다.
“혼혈들은 요정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읽을 줄 안다고 하던데.”
“저는 소프 가문의 사람이잖아요. 인간이요. 제 부모님이 인간이니까.”
“음. 먼 조상 중에 요정족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잘 알지도 못하는 윗대에 요정이 있었고, 우연히 프레사에게 그 능력이 전해진 거라면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스 님과 계약한 것부터 신기한 일이었어.’
식물을 다루는 능력을 타고난 것도 어쩌면 그 덕분인 걸까?
지금껏 별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것들이 이런 식으로 풀리다니, 프레사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멈추어 있었다.
그러자 리카온이 책을 톡톡 두드렸다.
“일단 그건 당장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누가 당신을 해치려고 했는지 알아내야죠.”
“아, 맞아요.”
프레사는 얼른 조제법의 순서대로 재료를 준비해서 간단히 손질하곤 항아리 속으로 던져 넣었다.
마지막 재료는 약초였는데, 하필이면 지금 다 떨어진 상태였다.
“재료가 하나 없네요. 얼른 키워야겠어요. 리카온 씨, 거기 흙만 담긴 화분 좀 주실래요?”
프레사는 항아리가 끓기 시작하자 국자로 휘휘 저으며 부탁했다.
리카온은 그녀의 말대로 촉촉한 흙이 담긴 빈 화분을 가져왔다.
“약초를 지금 키운다는 말입니까?”
“아.”
그러고 보니 리카온에게 아직 이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놀라지 마세요.”
프레사는 나직이 내뱉고 건네받은 화분에 씨앗을 심은 후 손가락으로 꾹 짓눌렀다.
그러자 푸른 싹이 돋아나더니 곧 당장 수확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리카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묘한 표정으로 프레사와 약초를 번갈아서 보았다.
프레사는 흙이 묻은 손을 대야에 담긴 깨끗한 물로 씻어내며 물었다.
“놀라셨나요?”
“……사실 무슨 능력이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습니다만, 직접 보니 놀랍네요. 이런 마법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마법은 아마 아닐 거예요. 전 마력 같은 건 타고나지 못했거든요.”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하네요.”
프레사는 가벼운 투로 대꾸하고 약초의 뿌리를 캐내서 물로 씻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그리고 펄펄 끓기 시작한 항아리 속으로 휙휙 던져 넣고 국자로 저어가며 말했다.
“음, 계약한 정령이 있기는 해요.”
“그 먼지처럼 생긴 것 말입니까?”
리카온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묻는 바람에 국자를 놓칠 뻔했다.
프레사는 두 손으로 국자를 꼭 붙잡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알고 계셨어요?”
“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근데 왜 말 안 하셨어요?”
“당신이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비밀일 수도 있으니까.”
“비밀이긴 했는데……. 이젠 비밀이 아니게 됐네요.”
프레사가 애매한 투로 내뱉고 항아리 속 약을 들여다보았다.
보랏빛을 띠던 약은 어느새 거무죽죽하고 걸쭉한,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액체로 변했다.
프레사는 조제법의 완성 부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지금 딱 좋은 상태이니 불을 끄고 10분 정도 식히면 된다고 쓰여 있었다.
프레사는 불을 끈 후 리카온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그냥 이상한 능력이 있다거나, 요정과 계약했다거나 그러면 이래저래 귀찮아질 것 같았어요. 그때의 전…… 그냥 약방을 차려서 돈만 벌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앞으로도 비밀로 하면 되죠. 내 입이 가벼워 보입니까?”
“음. 그건 아니지만……. 약방 식구들에게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프레사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조용히 지내긴 글렀잖아요. 그나저나 리카온 씨 얘기가 궁금해요. 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프레사는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리카온으로 바꾸었다.
하필 상황이 이렇게 되는 바람에 아직 리카온에 관해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분명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린 것이 분명했다.
리카온은 프레사를 지키기 위해 소환된 거나 다름없었으니, 본인의 의지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 제국에서의 일이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의미였고, 리카온이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일이라면 분명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내 얘기는 이 일이 마무리된 후에.”
하지만 리카온은 당장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잠시 그의 지친 얼굴을 빤히 직시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재촉해 봤자 말해 줄 사람도 아니었고, 그 역시 단 한 번도 프레사를 닦달한 적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는 그런 식으로 정의되었다.
서로를 위해서, 서로에게 불필요한 짐을 얹지 않는 관계.
손쉽게 수긍한 프레사는 국자로 약을 떠서 온도를 확인했다.
“약이 다 식었네요. 그럼, 먹여 볼까요?”
리카온은 암살자의 복면을 벗겼다.
복면 속에 감추어져 있던 얼굴은 생각보다 앳되어 보였다.
외모만 보자면 평범한 남자였다.
하지만 얼굴 여기저기에 흉터가 있었고, 그중 가장 큰 것은 왼쪽 눈 위쪽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이어진 흉터였다.
딱 봐도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겠거니 싶을 만큼 정직한 관상이었다.
리카온은 프레사가 그릇에 담아 준 약을 암살자의 입에 조금 흘려 넣었다.
뒤이어 암살자의 뺨을 손으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암살자가 바르르 전신을 떨더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처럼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프레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끝난 모양이었다.
“……!”
“암살자 씨, 우리 얘기 좀 할까요?”
프레사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며 상냥하게 질문을 던졌다.
“누가 프레사 소프를 죽이라고 당신을 고용했죠?”
암살자는 당연히 말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앙다물었으나, 약효를 이길 수는 없었던지 곧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길레스피…….”
로완인가?
예상했던 인물이라서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암살자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느릿느릿 더 이어졌다.
“백작 부인…….”
아, 앨리샤였구나.
이쪽도 예상 범인 중에 있었던 탓인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잠시 리카온과 눈빛을 교환한 프레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