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7화
앨리샤는 사흘 정도만 시간을 달라고 말한 후 돌아갔다.
프레사는 그녀가 떠나간 후에도 잠시간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줄곧 뒤쪽 창가의 화분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리스가 날아와 프레사의 어깨에 앉으며 말했다.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그러게요.”
프레사는 조금 피곤해져서 두 눈을 감았다가 아주 느리게 떴다.
로완 길레스피, 암살 위협, 여왕의 제안, 어딘가 불안한 리카온, 점점 더 늘어나는 약의 물량, 제국까지 사업을 넓히고 싶다는 욕망.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너무 많은 일이 휘몰아쳤다.
몸이 여러 개라면 좋을 텐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데 리스가 넌지시 말했다.
「너를 죽이려고 했던 인간이다. 그런데도 용서할 거냐?」
프레사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죽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을 겪었잖아요. 한때는 제가 좋아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프레사는 원작의 주인공이던 앨리샤를 꽤 좋아했었다. 보통 독자가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프레사가 주절주절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다 말고 그만두었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괜히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본인이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누가 그렇다고 말해도 반박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리스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잘했다.」
“아.”
「왜 그런 표정이냐? 내가 설마 너를 질책하기라도 하겠느냐.」
“……그러게요. 칭찬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프레사가 어색하게 얼버무리고 볼을 긁적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누군가 응접실 문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프레사가 말간 찻물이 담긴 찻잔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곧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제드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또 리카온이 그를 두고 혼자 오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서야 마을에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레사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드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프레사를 바라보았다.
앨리샤가 돌아간 후 이래저래 상념에 사로잡혔던 프레사가 제드를 마주 보았다.
제드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꽤 큰일인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맞은편을 눈짓하며 대답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드는 고개를 가로젓고 우뚝 선 채로 말문을 열었다.
“대공 전하의 형, 그러니까 칸체르의 황제 폐하와 관련된 일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에요. 그러지 않아도 리카온 씨가 말해주지 않아 궁금했던 참이었어요.”
리카온에게 물어보고 싶기야 했지만, 매번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 터였다.
그러나 제드의 말을 들으니 프레사 또한 궁금해졌다.
도대체 제국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리카온은 그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프레사가 대답한 후에도 제드는 여러 번 고민하는 듯 한참 시간을 끌었다.
프레사는 가만히 그의 표정을 살피며 기다렸다.
타국의 사람에게 제국의 문제를 털어놓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제드가 망설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꽤 중요한 일인 모양이구나.」
리스 역시 비슷한 감상을 내뱉으며 프레사의 정수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한참 후, 마침내 제드가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마력 중독을 앓고 계십니다. 저는 마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얼핏 듣기로는 폐하의 마력이 폐하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프레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마력 중독. 이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칸체르의 황제가 마력 때문에 미쳐가는 중이라니.
프레사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손가락 끝으로 찻잔을 톡톡 두드렸다.
어쩐지 리카온의 안색이 지나치게 엉망이더라.
프레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리카온 씨가 그걸 제어하는 건가요?”
“……예, 하지만 용독이 아직 남아 있어서 점점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해독제를 좀 더 강화했지만, 리카온이 자꾸 마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해독 속도가 더뎌졌을 터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해독제를 다시 만들어 봤자 별 소용은 없었다.
드래곤은 그 어떤 종족보다 마법에 특화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독은 마법사에게 치명적이다.
용독은 심장에 스며든 상태에서 마력을 타고 퍼져나가기 때문에 퍼지는 걸 막으려면 마법 사용을 자제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리카온은 무슨 자신감인지 마법을 펑펑 쓰고 있었다.
한동안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약이라도 만들어 먹여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한담.’
프레사는 리카온의 지친 얼굴을 떠올리며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골몰했다.
자칫했다간 곤란한 일에 휘말리게 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리카온이 프레사에게 말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관여해도 되는 건가?
“레사 님, 혹시 마력 중독 치료제를 만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서 제드가 불쑥 치료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약이에요. 제가 가진 제조법에 없을 수도 있고요. 온전히 새로 만들어야 할 수도 있어서 효능을 장담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지만, 제드는 아마 눈치챘을 터다.
정확한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환자를 직접 만나 봐야 했다.
증상이 어떤지, 중증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나서 약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것이 약제사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대공 전하까지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프레사가 의외로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제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간절히 부탁했다.
할 수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프레사가 지금껏 지켜본 제드는 충성심이 무척 강한 기사였다.
그래서 지금도 리카온과 상의하지 않고 이렇게 혼자 찾아와 부탁하는 거겠지.
리카온이 프레사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테니까.
프레사는 제드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리카온 씨와 얘기해 볼게요. 괜찮으실까요? 물론 제드 씨가 말해줬다고는 하지 않을게요. 조만간 대화해야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어요.”
“……예, 감사합니다.”
제드가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사는 찻주전자를 기울여 깨끗한 새 찻잔에 약차를 따라 그에게 건넸다.
“진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차예요.”
“예.”
제드는 그제야 얌전히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마력 중독, 들어본 적은 있다. 치료하기 쉽지 않을 텐데……. 물론 내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리스가 거들먹거리는 어투로 프레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쉽지 않다는 말에 조금 걱정스러웠으나 이어진 말에 프레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방법이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더 시간을 끌지 말고 얼른 리스의 말을 들어봐야 했다.
프레사는 제드를 향해 냅다 본론을 꺼냈다.
“제드 씨, 지금부터 제가 말을 할 텐데 미쳐서 혼잣말하는 건 아니고요. 사실 제가 계약한 정령이 있거든요. 정령과 잠깐 대화 좀 할게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드가 차를 마시다 말고 황당한 표정을 내보였지만, 프레사는 이미 리스를 두 손으로 가볍게 붙잡은 채 말문을 열었다.
“그럼 방법이 있단 말씀이세요?”
「물론이다. 오래전에 요정족이 마력 중독을 앓는 경우가 꽤 있었지. 그들 역시 마력을 타고나니까 말이다.」
“약을 만들면 되나요?”
「직접 그 황제를 만나 보기야 해야겠지만, 그래. 대신 그냥 약초가 아니다. 세계수의 뿌리로 가야 해. 요정의 마을에서만 자란다. 하지만 너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으냐.」
“다른 방법이요?”
프레사가 전혀 모르겠다는 투로 묻자 리스가 팔짱을 꼰 채 대답했다.
「이미 뿌리에 다녀온 인간이 있잖느냐, 그 혼혈 요정.」
아이작 케이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이작이라면 분명 그 약초를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프레사는 방긋 웃으며 리스를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감사해요, 리스 님.”
「당연한 일에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리스는 헛기침하며 부끄러워했지만, 어쨌든 프레사는 리카온을 도울 방법을 찾아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다.
이제 남은 건 리카온을 설득하는 일과 아이작에게 약초를 부탁하는 일이었다.
후자는 아이작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지만, 전자가 문제였다.
과연 리카온이 프레사를 황제와 만나도록 허락해 줄까?
프레사가 어떻게 하면 리카온을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조용히 차를 마시던 제드가 말문을 열었다.
“정말…… 정령이 이곳에 있습니까?”
제드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흔들리는 눈으로 프레사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프레사는 대답 대신 벌떡 일어나 섰다.
“일단 리카온 씨와 얘기를 좀 해야겠어요. 그럼 먼저 갈게요. 천천히 쉬었다 가세요, 제드 씨.”
“아, 예. 정령은 데려가시는 겁니까?”
“네, 물론이에요. 약차 꼭 다 마시고 가세요.”
짤막이 대꾸한 프레사는 리스를 어깨에 얹고 서둘러 리카온에게로 향했다.
리카온은 약방 판매대 앞에 서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리카온 씨.”
“아, 레사.”
프레사가 바로 옆에 다가올 때까지 상념에 잠겨 있던 리카온이 프레사를 응시했다.
프레사는 잠시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차분하게 용건을 밝혔다.
“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