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8화
리카온은 꽤 오랜 시간 침묵했다.
프레사가 갑자기 찾아와서 던진 질문이 그에게 꽤 곤란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프레사는 이대로 그냥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간, 리카온이 다시 제국으로 떠날 때까지 아무 말도 듣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며칠 정도 지나면 리카온이 먼저 사정을 이야기해 줄 줄 알았다.
늘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프레사의 예상보다 그 기간이 길어졌고, 제드의 부탁을 들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리카온은 프레사의 일이라면 가장 먼저 앞서서 도와줬으니 프레사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다.
프레사에게 리카온은 중요한 사람이었으므로.
프레사가 제법 단호하고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서 있는데, 리카온이 한참 만에야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제드가 말했군요.”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리카온 씨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니까 이유를 알고 싶은 것뿐이에요.”
프레사는 뜨끔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포장했다.
하지만 리카온은 다시 입을 닫고서 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프레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프레사는 조급해져서 재차 말했다.
“돌아오면 이유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리카온 씨.”
함께 춤을 췄던 그날 새벽, 리카온은 다시 돌아오면 무슨 일이었는지 설명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프레사가 그 일을 꺼내자 리카온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리고 곧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프레사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서며 말했다.
“제드에게 들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난 당신이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걸 바라지 않아서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이미 제드가 모든 사실을 말했다고 확신하는 투였다.
하긴, 리카온도 눈이 있는데 제드가 뻔히 응접실로 향하는 걸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제드 역시 리카온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터다.
그래서 프레사는 더는 부정하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말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리카온 씨는 저를 위해서 위험한 일에 기꺼이 휘말려 줬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프레사는 흔들림 없이 맑은 눈으로 리카온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거절하지 마세요. 리카온 씨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드 씨를 통해서라도 제국에 갈 테니까.”
사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리카온에게도 민폐일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협박이라도 하지 않으면 리카온이 프레사의 도움을 거절할 것 같았다.
리카온은 여전히 곤란한 얼굴이었다.
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좋아진 그의 혈색이 그새 음울해진 걸 보면, 프레사는 절로 속이 상했다.
“레사.”
“리카온 씨, 저 유능해요. 방법도 미리 생각해 뒀어요. 여기 정령님이 알려주셨거든요.”
프레사는 제 두 손바닥에 올라앉아 팔짱을 꼰 리스를 들어 올렸다.
「감사한 줄 알아라, 인간 마법사.」
다행히 리카온은 리스를 볼 수 있을 뿐 대화까지 통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리스와 프레사를 번갈아서 볼 뿐이었다.
“진짜예요. 그리고 그냥 돕겠다는 건 아니에요. 저도 원하는 게 있어요.”
프레사는 결국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원래 부탁하려고 하긴 했었지만, 이런 식으로 리카온을 회유하는 데에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리카온은 프레사의 말에 픽 웃으며 물었다.
“그건 좀 흥미가 생기네요. 거래입니까?”
“네. 이제 제국에서 제 약을 팔고 싶어요. 황제 폐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만들게 되면, 분명 신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리카온이 듣기에는 무의미한 소리가 분명할 것이다.
프레사는 이미 왕국 내에서 여왕에게 직접 부탁받을 만큼 인지도가 높았다.
제국까지 진출하는 것이 그리 어려울 리 없었는데 굳이 이런 이유를 붙인 이유가 뻔했다.
“정말이지, 당신은…….”
리카온이 쓰게 웃으며 뒷말을 삼켰다.
프레사는 굳이 이어지지 않은 말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저와 거래하실 건가요?”
재촉하는 프레사의 질문에 리카온이 잠시간 더 고민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탁할게요, 레사.”
“서로 후회 없는 거래가 되도록 노력해요.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프레사는 그제야 힘껏 쥐었던 주먹을 스르르 풀고서 방긋 웃었다.
“그전에 리카온 씨는 좀 더 쉬셔야겠어요.”
프레사가 단호하게 내뱉은 말에 리카온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사장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