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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9화 (59/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59화

장부를 어떤 식으로 폭로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 필츠 여왕의 초대를 받은 프레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떠올렸다.

약속한 날에 필츠 여왕의 응접실을 찾은 프레사는 잠자코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간 도리어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니 신중해야 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프레사가 시선을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필츠 여왕이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인가요?”

지난번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실 프레사는 여왕의 제안을 몇 번이나 고민했다.

다시는 없을 기회였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가 내린 결론은 여왕이 생각한 것과는 다를 것이다.

“죄송합니다, 폐하.”

“……거절인가요?”

필츠 여왕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프레사는 구태여 시간을 들이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려요, 폐하.”

거짓말이 아니라 프레사에게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칸체르 제국의 황제를 위해 마력 중독 치료제를 만들어야 했고, 리스가 능력을 회복하면 세계수의 뿌리로 검은 덩어리의 원인을 찾으러 가야 했다.

물론 아카데미에 입학해 졸업 후 정식 절차를 밟으면 꿈에 그리던 왕국 약제사가 되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소중한 이들과의 약속이 더 중요했다.

여왕이 아무런 대답 없이 프레사를 쳐다보기만 하자 프레사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졸업까지 최소 6년 이상이 걸린다고 들었어요. 저에게는 너무 긴 시간입니다.”

“천천히 고민해 봐도 될 텐데요. 이미 말했듯 그대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에 제안한 겁니다. 입학은 언제든 할 수 있어요, 소프 백작 영애.”

프레사는 바로 저 소프 백작 영애라는 호칭이 불편했다.

왕국으로 돌아온다면 아마 저 불쾌한 가문의 이름을 계속 달고 살아야 할 것이다.

프레사는 이제 소프 가문의 사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도 여왕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필츠 여왕에게는 왕국의 유명 가문이었던 소프 가문이 꽤 익숙할 터다.

‘원래 높은 분들은 무신경하시지.’

분명 프레사와 소프 가문 사이의 일을 다 알고 있을 텐데 굳이 그 호칭을 사용하는 걸 보면 말이다.

프레사는 씁쓸한 마음을 숨긴 채 말문을 열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어서요. 하지만 제안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어쨌든 필츠 여왕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자였다.

이번 기회에 인맥을 넓혀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건 사실이었다.

프레사는 그래서 로완 길레스피의 비밀 장부를 챙겨왔다.

로완을 처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건 바로 필츠 여왕을 통해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필츠 여왕은 프레사가 제안을 거절하자 조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거절할 거라고는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 남편, 그러니까 국왕 폐하께서 그대의 탈모 치료제 효과를 본 사람이라는 걸 말하지 못했군요. 그이의 머리카락이 다시 나는 걸 확인하고 정말 오랜만에 기쁨을 느꼈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당장 이 약을 개발한 이에게 상을 내리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곧 여왕이 내뱉은 말에 프레사는 눈을 크게 떴다.

프레사는 예전에 국왕을 몇 번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다.

늘 화려한 모자를 쓰고 있어서 탈모를 앓고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필츠 여왕은 남편이 머리카락을 되찾아 진심으로 행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대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줘요. 나는 그대의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날 수밖에요.”

“이렇게까지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제 약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기도 하고요.”

살짝 미소 지은 프레사는 잠시 그녀의 표정을 살핀 후 가죽 가방을 열어 로완의 장부를 꺼내 내밀었다.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신 보여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어요.”

“……이건 뭐죠?”

“길레스피 백작의 비밀 장부입니다.”

“비밀 장부?”

장부를 건네받은 여왕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거짓이라면 그대는 왕족을 기만한 죄로 처벌받게 될 것입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프레사는 의연한 눈으로 필츠 여왕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여왕은 신임하는 기사인 로완 길레스피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천천히 장부를 펼쳤다.

떨떠름하던 그녀의 반응이 분노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게 대체…….”

“제가 먼저 살펴본 결과, 1년 전부터 꾸준히 기사단의 예산을 횡령했더군요.”

필츠 여왕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여러 번 장부를 확인했지만, 로완 길레스피의 중죄만 더 확실해질 뿐이었다.

“……길레스피 백작을 당장 왕성으로 호출해. 당장!”

여왕의 서슬 퍼런 불호령에 대기 중이던 호위 기사 한 명이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때마침 오늘은 왕실 기사단의 정기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즉 로완 길레스피가 왕성 내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아내가 사라졌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본인 일정을 소화하다니 어떻게 보면 참 독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이혼 소송을 하지 않고도 앨리샤를 떨쳐냈다고 생각해서 잘됐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바로 체포 명령을 내리시지 않는 걸 보면, 꽤 신뢰가 두터웠던 모양이야.’

프레사가 기억하는 원작의 필츠 여왕은 로완과 앨리샤의 로맨스를 무척 좋아했다.

이유는 필츠 여왕 또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고, 현 국왕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결혼에 성공한 탓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이 넘치는 필츠 여왕과 달리 길레스피 백작 부부는 파멸의 길을 걸었다.

프레사는 부들부들 분노로 떠는 필츠 여왕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급스러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일어났다.

“폐하,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슬슬 이 이야기에서 빠질 시간이었다.

로완 길레스피를 해결했으니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신경 써야 했다.

여왕은 그새 감정을 추슬렀는지 차분한 눈으로 프레사를 응시했다.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곧 왕국을 떠날 예정이에요. 그럼 다시 뵙는 날까지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사는 여왕이 여지를 두는 듯한 말을 꺼내자 곧바로 잘라냈다.

다소 무례할지도 모르는 행동이었으나 어영부영 거절하지 못하면 이후가 더 곤란해질 뿐이었다.

“왕국을 떠난다니…….”

여왕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응접실 밖에서 로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길레스피 백작입니다.”

필츠 여왕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손만 한번 흔들어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고, 기사 중 한 명이 문을 열어 주었다.

“프레사?”

영문을 모르고 필츠 여왕을 알현하러 온 로완이 프레사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프레사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로완을 똑바로 마주 볼 뿐이었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죠, 로완 길레스피.”

“……뭐?”

“그럼 행운을 빌어요.”

프레사는 필츠 여왕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혀 보인 뒤 느릿느릿 로완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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