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1화
제국으로 떠날 준비는 척척 진행되었다.
일단 약방의 관리는 로렌이 당분간 맡아주기로 했고, 아이작도 종종 들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작에게는 마력 중독 치료제에 필요한 약초까지 부탁해 두었다.
황성에서 지낼 예정이었으니 짐은 최소한으로만 챙겼다.
남은 문제는 리스였다.
하필 계약하면서 약방에 묶이는 바람에 마음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 곤란했다.
프레사는 리카온에게 조언도 구하고, 정령과 관련된 서적을 여러 권 읽었으나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러다간 리스를 약방에 두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무렵, 우울해하던 리스가 갑자기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말했다.
「레사야, 내가 방법을 찾았다.」
“방법이요? 어떻게요?”
프레사는 어려운 말로 쓰인 <세계수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리스가 보송보송한 가슴을 한껏 앞으로 내밀며 으스댔다.
「처음 나와 계약했을 때 죽은 세계수의 가지를 심었던 화분, 그 화분을 들고 가면 된다!」
뜬금없는 말에 프레사의 답변은 아주 늦게 흘러나왔다.
“……진심이세요?”
「이 고서에 의하면 나는 이 약방이 아니라 그 화분에 묶인 게 분명하다. 그러니 화분만 챙기면 문제가 없을 거다. 한번 해 보자.」
아직 프레사가 읽지 못한 낡은 책을 가리킨 리스가 더없이 진지했기에 프레사도 그냥 흘려넘길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프레사는 결국 지하실로 내려가 세계수의 가지가 무럭무럭 자란 화분을 안아 들었다.
분갈이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잎이 무성했다.
“만약 이 방법이 틀려서 리스 님이 또 기절하면 어떡해요?”
「그래도 금방 깨어나지 않았더냐. 살짝 아프기야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얼른 가자.」
리스는 의연하게 대꾸하고 먼저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프레사는 걱정되는 마음에 옅은 한숨을 내쉬고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조금 느릿느릿 현관문을 연 다음, 어느새 리스가 앉은 화분을 꽉 껴안고서 밖으로 나섰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날이 흐린 탓인지 이른 저녁인데도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프레사는 리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그리고 텃밭을 지나 대문에 도착했는데도 칼리스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스 님, 괜찮으세요?”
「아주 멀쩡하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구나. 계약자도 없이 남겨질까 봐 어찌나 걱정했는지…….」
리스가 화분 위를 둥글게 맴돌며 지금껏 말하지 않았던 심정을 줄줄 늘어놓다가 멈추었다.
「흠, 흠. 어쨌든 이제 해결됐으니 떠날 준비는 끝 아니냐?」
“그렇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리스 님을 두고 가지 않아도 돼서요.”
프레사는 작게 미소 지은 채 리스를 바라보았다.
리스는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었으나 세계수 가지 뒤에 몸을 숨기는 바람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부끄러우신 거구나.’
프레사는 굳이 그 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삼켰다.
살아온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많은 정령이었지만, 이럴 때마다 종종 귀엽게 보였다.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잘 챙겨야겠어요. 아무래도 화분 근처에 머물러야 하는 걸 보면, 이 세계수의 가지가 소환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 같으니까요.”
「능력을 온전히 회복하기만 한다면 고작 이런 작은 가지에 의지할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다.」
리스는 작은 손가락 끝으로 세계수 잎을 툭툭 두드리며 꿍얼거렸다.
“곧 그런 날이 올 거예요. 제국에 가서도 열심히 할 테니까요.”
프레사는 리스의 보송한 머리를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
어쨌든 리스와 화분이 한데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지금으로써는 충분했다.
그때 차가운 무언가가 프레사의 이마를 톡 두드렸다.
프레사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그새 더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가 내릴 것 같으니까 얼른 들어가요.”
「그래, 나도 비는 질색이다.」
“식물의 정령인데 비를 싫어해도 괜찮은 거예요?”
「식물이 모두 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다, 레사야.」
하여튼 리스는 특이한 정령이었다.
프레사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톡톡 떨어지더니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