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2화
로렌은 제롬을 약방에서 일하게 해주자고 말했다.
엘리아스와 에이미가 로렌을 감옥에 가둘 때 제롬이 그들을 말렸다는, 프레사가 전혀 예상조차 못 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제롬은 로렌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프레사는 로렌과 제롬에게 단단히 일렀다.
절대 도련님으로 칭하지 말 것, 제롬을 실컷 부려 먹을 것, 만약 제롬이 약속을 깨면 즉시 약방을 떠날 것.
말로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수정구에 녹음한 후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그런데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프레사는 제국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제롬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찮은 동정심으로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
로렌에게는 언제든 연락이 가능한 프레사 전용 수정구를 건네주었다.
다행히 비가 쏟아지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화창한 날씨였다.
프레사는 짐과 리스의 화분 그리고 황성 좌표가 지정된 마법 스크롤을 챙겨서 현관을 나섰다.
“아가씨, 제국에는 흉악범이 그렇게 많대요. 황성 밖으로는 되도록 나가지 마시고, 늘 주변을 경계하세요. 누가 돈 준다고 해도 따라가시면 안 돼요. 아셨죠?”
“매주 조달하셔야 할 물량 확인하시는 거 잊지 마십시오. 약방에 오시기 전에는 연락하시고요.”
“정말 제국으로 떠나는 거야? 언제 오는데?”
로렌과 아이작 그리고 제롬까지 줄줄 따라 나오며 제 할 말만 하는 덕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프레사는 짐가방을 질질 끌고 나가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겠으니까 다들 잔소리는 그만 해요. 그리고 제롬, 나한테 어리광 부릴 처지야? 로렌 말이나 잘 들어.”
“……알았어.”
제롬이 금세 기가 죽어 시무룩한 얼굴로 멈추어 섰다.
프레사는 한숨을 내쉬고 대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리카온과 제드가 벌써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리카온 씨! 제드 씨!”
프레사가 짐을 들지 않은 손을 흔들며 그들을 불렀다.
“짐은 이리 줘요.”
리카온이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프레사의 작고 소중한 가방을 가리키며 손을 내밀었다.
프레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내저었지만, 리카온이 더 빨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방은 벌써 리카온의 손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결국 프레사는 리스가 자리 잡은 세계수 화분만 두 팔로 껴안고서 로렌과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
“로렌, 케이드 씨.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마법 스크롤을 많이 챙겼으니까 필요하면 바로 돌아올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가씨……. 건강 잘 챙기세요.”
로렌이 울먹거리며 앞치마로 눈가를 콕콕 닦았다.
“계약서 잘 챙기셨습니까? 제국에는 사기꾼이 많다고 하니 조심하시고요.”
아이작은 팔짱을 꼰 채 서서 또 잔소리였다.
하여튼 이중 잔소리가 가장 심한 사람은 아이작이었다.
프레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저 뒤쪽에 서서 괜히 주변만 두리번거리는 제롬을 힐끔 쳐다보았다.
“로렌, 내가 말한 거 잊지 마. 절대 풀어져서는 안 돼. 소프 남매들이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았지?”
“아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니까요.”
로렌은 그새 눈물을 그치고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프레사는 마주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로렌.”
“네, 아가씨.”
나름 긴 작별 인사가 마무리되고, 프레사와 리카온 그리고 제드는 각각 스크롤을 찢었다.
밝은 빛이 잠시 맴돌았으나 곧 사라지고 세 사람 역시 빛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