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3화
“어서 와요, 프레사. 아,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그레나딘 대공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책이 가득한 넓은 황제의 집무실, 칸체르의 황제 라우렐은 친절하게 프레사를 맞이해 주었다.
따뜻하고 고급스러운 차향과 밝은 햇볕이 드는 집무실의 분위기, 그리고 라우렐이 상상했던 것보다 온화해 보이는 탓에 프레사는 긴장이 어느덧 거의 풀린 상태였다.
프레사는 맞은편의 라우렐과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부디 황성이 당신에게 불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리고.”
라우렐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프레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치료제도 꼭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확실히 강대국의 황제는 황제였다.
순식간에 다정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냉정한 시선이 프레사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물론 프레사는 그다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인이 병을 앓는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보통 마력 중독을 앓는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제국에 오기 전 마력 중독에 관해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대부분 증상이 그랬다.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주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공격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원래대로 돌아오면 그 동안 저지른 일을 전부 잊어버린다고.
‘리카온이 설명해 준 건가?’
아니면 증상이 발현되었을 때 저지른 일을 기억하는 걸까?
만약 후자라면 라우렐 본인에게 무척 괴롭고 끔찍한 일일 터였다.
「마력이 요동치고 있구나.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라우렐 주변을 느릿느릿 맴돌며 관찰하던 리스가 혀를 찼다.
「하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으니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 거다.」
프레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지금 라우렐은 마력 중독을 앓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때, 프레사와 라우렐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리카온이 불쑥 말문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 여독을 풀겠습니다, 폐하. 필요하시면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아, 이런. 내가 눈치 없이 두 사람을 너무 붙잡아 뒀군요.”
라우렐이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프레사에게 곧장 인사했다.
“조만간 또 봐요, 프레사.”
“감사합니다, 폐하.”
아마 조만간 또 볼 수밖에 없을 터였다.
리카온에게 듣기로 라우렐은 사흘에 한 번 새벽마다 증상이 발현된다고 했다.
본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였는데 최근에 부쩍 빈도가 잦아졌단다.
‘이러다 시도 때도 없이 증상이 나타날지도 모르겠어. 그전에 어떻게든 치료제를 만들어야 해.’
프레사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일어나 서는데, 라우렐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 프레사.”
“네?”
“당분간은 리카온의 약혼자로 지내는 게 좋겠어요. 임시로라도. 두 사람이 정말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황성에서 직위라는 건 꽤 중요하니까요.”
라우렐이 장난스러운 듯, 그러나 진심이 담긴 어조로 내뱉은 말에 프레사가 당황해서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폐하.”
리카온의 표정이 일순간 흐트러졌으나 라우렐은 의견을 꺾지 않았다.
“농담이 아닙니다, 대공. 프레사, 제국의 귀족들은 상대의 출신으로 트집 잡는 데에 도가 텄거든요. 어차피 둘이 약혼한 사이라고 소문이 다 났으니 새삼스럽지 않을 텐데요.”
프레사는 그제야 제국까지 가짜 약혼 소식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용감하게도 그런 짓을 했었네.’
프레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묘하게 경직된 리카온과 프레사의 얼굴을 번갈아서 바라보던 라우렐이 넌지시 덧붙였다.
“모쪼록 둘이 잘 상의해서 결정했으면 합니다. 당연히 강요는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