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4화
마탑은 프레사가 예상했던 것만큼 넓고 깔끔했다.
황성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규모가 소프 저택보다 훨씬 큰 탓에 묘한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일단 저택과 마탑은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마탑은 이름 그대로 ‘탑’이었으니까.
백색 마탑의 주인, 그레나딘 대공.
리카온의 호칭이 이제야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가 살면서 마탑에 또 오게 될 줄이야. 여전하구나, 여전해. 이 음침한 분위기.」
리스가 투덜거리며 화분의 세계수 잎 아래에 몸을 숨겼다.
요즘 들어 정령은 부쩍 불평불만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진심으로 불만스러운 건 아닌 것 같지만, 어리광이 늘어난 느낌이랄까.
「나 때는 지나가던 어린아이도 마법사일 만큼 흔해 빠진 존재였는데, 지금은 마법사라면 놀라고 보니 쯧.」
물론 리스가 가볍게 내뱉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오래전에는 가문마다 마법사를 채용하는 걸 당연하게 여길 만큼 마법사가 많았다.
하지만 몇 세대 전부터 마력을 타고나도 마법사로 성장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가 자연스러운 섭리든, 세계수의 뿌리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이든 하여튼 확실한 건 없었다.
어쨌든 리카온은 그래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아니었으니 몇 줄만 언급되고 말았지만, 리카온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마법사가 흔치 않으니까 당연한 일이긴 해. 심지어 마탑주는 이 세계에 두 명뿐이니까.’
그 끔찍한 용독을 품고 긴 시간을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긴 했다.
프레사가 한 걸음 앞서가는 리카온의 정갈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감탄하는데, 지나가던 사용인 몇 명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리카온과 함께 있으니 굳이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듯했다.
그들의 주인이 오랜만에 돌아온 것도 반가울 텐데 낯선 사람을 손님으로 데려왔으니 궁금할 법도 했다.
프레사는 리카온이 들어주겠다는 화분을 굳이 품에 꼭 안고서 리카온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손님이 방문하는 건 오랜만이라서 다들 놀랐나 봅니다.”
프레사가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막 계단을 올라가던 리카온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사용인들이 보내는 시선이 꽤 부담스러웠던 건 프레사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레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불편하지 않으니 괜찮아요. 저 같아도 제가 누구인지 궁금할 것 같거든요. 그나저나 계단을 얼마나 올라가야 하는 건가요?”
“다 왔습니다.”
“네?”
분명 계단을 하나만 밟고 올라갔는데 다 왔다니, 프레사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눈앞에 빼곡하던 계단이 사라지고 낯선 문이 나타나자 비로소 리카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꼭 탑이 움직이는 것 같네요.”
“계단을 하나씩 밟고 다니다간 체력 고갈로 쓰러질 겁니다. 마법은 그런 점에서 편리하죠. 이 탑은 마법으로 유지되는 곳이니까.”
리카온이 담백하게 설명하고는 이 탑만큼이나 새하얀 문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별다른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문이 스르륵 자연스럽게 열렸다.
“여기가 당신이 머무를 방입니다.”
“아, 여기였군요.”
프레사는 천천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창문에는 하늘거리는 반투명한 커튼이 달려 있었고, 깔끔한 원목 침대와 새하얀 침구 그리고 바닥에 깔린 폭신한 카펫이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끌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색감의 원목과 흰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인테리어였다.
프레사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리카온을 응시했다.
“직접 꾸미셨나요?”
“……내가 고르긴 했습니다만, 마음에 안 듭니까?”
리카온은 프레사의 반응에 조금 기가 죽은 얼굴이었다.
프레사는 눈만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요. 너무 제 취향이라서요. 고마워요, 리카온 씨. 지내는 동안 무척 편할 것 같네요.”
리카온은 잠시 입을 벌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작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먼저 방으로 들어서서, 내내 그가 들고 온 프레사의 짐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파로 마을에서처럼 바다가 보이면 좋을 것 같아서, 잘 보이는 방으로 골랐습니다. 하지만 되도록 창문은 오래 열어 두지 않는 게 좋아요. 소금기가 날아 들어올 테니. 이곳의 바다는 파로 마을보다 훨씬 춥습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조심해요.”
리카온이 자잘한 설명을 덧붙이더니 프레사를 돌아보았다.
“그 정령은 언제까지 껴안고 있을 겁니까?”
프레사는 그제야 화분을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꽤 무게감이 있는데도 지금껏 별다른 생각 없이 들고 다녀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프레사는 어느새 화분의 나뭇가지에 기대어 잠든 리스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려 깨웠다.
리스가 좁쌀처럼 작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프레사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리스 님, 어디에 화분을 두는 게 좋을까요?”
「흠.」
리스는 그새 잠이 다 깼는지 까다로운 세입자처럼 방을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 바로 아래를 가리켰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 좋겠다. 식물이 죽으면 큰일일 테니.」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프레사가 장난스럽게 대꾸하곤 화분을 창문 아래에 잘 내려놓았다.
리카온은 그녀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정령 주제에 너무 좋은 대접을 받는 거 아닙니까?”
「이 인간은 사사건건 시비로구나. 마법사만 아니었어도 내가 진작 머리털을 다 뜯었을 거다.」
“별 힘도 없어 보이는데 그냥 계약 파기하는 게 어때요.”
「오만한 마법사 놈의 말은 듣지 말거라, 레사야!」
리카온은 리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텐데 꼭 들리는 것처럼 말했다.
덕분에 리스가 리카온의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으나 어차피 솜털처럼 가벼운 손짓이었기에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역시나 리카온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한 얼굴로 프레사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럼 잠시 쉬어요, 레사. 짐도 풀고요.”
“네, 이래저래 고마워요.”
“별말씀을.”
리카온은 살짝 고개를 까딱인 후 방을 떠났다.
프레사는 잠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설마 제국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어.’
제국은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그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번 잠깐 들렀을 때와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꽤 장기 여행이니까.’
프레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서 멍하니 별 의미도 없는 생각만 반복했다.
「피곤하구나.」
리스가 날아와 프레사의 얼굴 옆에 바짝 붙으며 중얼거렸다.
아, 피곤한 거였구나.
프레사는 그제야 온몸이 침대 아래로 푹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