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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5화 (65/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5화

프레사는 서둘러 방의 불을 켜고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세요.”

리카온은 음식이 담긴 트롤리를 자연스럽게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저녁 식사 가져왔어요. 좀 쉬었습니까?”

“네, 쉬긴 했는데…… 리카온 씨가 직접 식사를 챙겨 오신 건가요?”

프레사가 얼떨떨한 눈으로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탑의 주인이 이렇게 사용인처럼 일하다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물론 리카온은 이전에도 프레사에게 요리를 대접해 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그가 제국의 대공인 줄 몰랐으니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다.

“네. 할 얘기도 있어서 그냥 제가 챙겨왔습니다. 놀랐습니까?”

“귀족들은 원래 이런 일을 안 하니까요.”

“당신은 꼭 귀족이 아닌 것처럼 말하네요.”

리카온의 말에 프레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프레사 소프는 귀족 출신이긴 하나, 그녀의 전생은 그렇지 않았기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파로 마을에서는 귀족처럼 지내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앉아요.”

짤막하게 되받아친 리카온이 둥근 원목 탁자 위에 접시를 하나둘 내려놓으며 눈짓했다.

프레사는 그제야 문을 닫고 그쪽으로 다가가 식사 준비를 도왔다.

따뜻한 야채수프와 버터로 구운 감자 그리고 잘 익힌 소고기가 주메뉴였다.

리카온은 프레사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살짝 빼 주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환영 연회를 열고 싶다고 하시는군요.”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전 내키지 않는데요.”

프레사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으며 리카온을 돌아보았다.

황성에서 연회라니, 그것도 자신을 환영하는 연회.

생각만 해도 부담스러웠다.

심지어 황제가 주최하는 환영 연회라면 분명 제국의 귀족들이 많이 참석할 테고, 그들은 프레사와 리카온을 약혼한 사이로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라우렐은 언제 마력 중독 증상이 나타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혹 연회장에서 증상이 발현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야.’

라우렐은 지금껏 되도록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다고 했다.

그런데 고작 프레사를 환영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문득 다른 이유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나보다는 리카온 씨를 위한 연회인 거야.’

사악한 드래곤을 처치하고 용독의 저주를 받은 하나뿐인 동생이,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해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음에도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을 축하하고 싶을 터였다.

아마 황제나 대공에게 반감을 지닌 귀족이 분명 존재할 테니 그들에게 리카온이 아직 건재함을 알려줄 심산일 것이다.

사실 프레사는 라우렐과 리카온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잘 몰랐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서로를 꽤 소중히 여기는 거 아닌가?

프레사는 이 형제들의 우애를 남몰래 흐뭇해하며 빙긋 미소 지었다.

리카온이 어깨를 으쓱하곤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저 역시 당신처럼 말했지만, 폐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남달랐습니다. 어지간히도 당신을 극진히 대접하고 싶으신가 봅니다.”

리카온이 인상을 찡그린 채 짤막이 혀를 찼다.

‘리카온 씨도 참 눈치가 없구나. 아니면 쑥스러워서 모르는 척하는 걸지도.’

프레사는 굳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지 않고 말을 바꾸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연회에 참석하는 게 좋겠어요. 황제 폐하의 치료제를 무사히 만들고 나면, 이곳에서도 제 약을 판매해야 하니까요. 미리 귀족들에게 얼굴을 알리면 좋잖아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상단과 마탑을 통해 유통한다면 문제 될 건 없으니까.”

리카온이 폭신한 빵을 하나 집어 들더니 반으로 갈라 프레사에게 내밀었다.

‘하여튼 쉽게 넘어가지를 않는다니까.’

속으로 중얼거린 프레사는 빵을 건네받으며 대꾸했다.

“리카온 씨의 말도 맞지만, 황제 폐하의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려고요.”

“뭐, 당신이 괜찮다면 상관은 없습니다.”

리카온은 여전히 프레사가 진심인지 확인하려는 듯 눈을 빤히 보았지만, 프레사는 소프 저택에서부터 갈고 닦은 뻔뻔한 표정을 유지했다.

“마탑 요리사 실력이 훌륭하네요.”

연회 이야기를 나누느라 음식에 대한 평가가 조금 늦기는 했지만, 진심이 담긴 감탄이었다.

빵은 고소하고 부드러웠으며 수프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가장 중요한 구운 소고기는 육즙이 가득해서 씹을 때마다 만족스러웠다.

“오늘 특별히 신경 쓰라고 일렀습니다. 중요한 손님이 방문했으니까.”

프레사가 즐겁게 식사에 임하자 리카온은 사뭇 뿌듯한 얼굴이었다.

프레사는 중요한 손님이라는 말을 바로 앞에서 들으니 묘하게 민망해져서 고기만 씹어 삼켰다.

그렇게 몇 번 더 대화를 주고받자 저녁 식사가 끝났다.

프레사가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며 깨끗한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려 닦는데 리카온이 불쑥 말을 꺼냈다.

“레사,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건데요?”

“물건은 아니고 장소입니다. 지금 바로 보여주고 싶어서.”

리카온은 그렇게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깜짝 선물을 준비해 둔 아이처럼 보여서 조금 귀엽기까지 했다.

프레사는 갑작스러운 말에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냅킨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리카온 씨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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