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7화
제드와 루이제가 미리 맞춘 것처럼 주변을 가리고 섰다.
프레사는 드레스 소매에서 시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지금 당장 먹여야 해요. 증상이 심해지면 임시 약으로 억제하지 못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리카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망토를 살짝 들어 올렸다.
라우렐이 불러일으키는 마력의 폭풍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프레사는 망설이지 않고 살짝 벌어진 라우렐의 입에 시약병 입구를 억지로 쑤셔 넣었다.
다행히 아직 증상이 완전히 나타난 게 아니라서 큰 저항은 없었다.
리카온이 마법으로 붙잡고 있는 탓도 컸지만.
프레사는 무사히 약을 다 먹이고 나서 라우렐의 상태를 살폈다.
서서히 마력의 파동이 가라앉고 있는 듯했다.
“……폐하?”
리카온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라우렐을 불렀다.
라우렐은 두 눈을 꾹 감고 있다가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다시 리카온과 똑같은 보라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약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라우렐이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가 산산조각이 난 잔을 내려다보았다.
“또 내가…… 정신을 잃었었나 보네.”
“임시로 진정시켰을 뿐이니 약효가 그리 길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이번 발작은 무사히 넘겼어요.”
프레사는 그제야 안도하며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연주곡이 절정으로 치닫는 중이었으니 곧 춤을 끝낸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올 터였다.
그전에 상황이 정리되어 무척 다행이었다.
라우렐이 프레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프레사. 진심입니다.”
“아직 감사 인사를 하시기에는 일러요. 조만간 치료제를 성공적으로 만들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
프레사는 사뭇 단호하게 대꾸하고 리카온을 응시했다.
리카온의 표정은 평소와 별다르지 않았으나 그 역시 안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 발작이 일어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치료제를 만들어야 했다.
‘케이드 씨에게 다시 연락해야겠어.’
겉보기에는 수월하게 일이 마무리되었지만, 내심 긴장했던 모양인지 프레사는 연회를 즐길 기력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나는 돌아가 쉬어야겠어요. 다들 고생했습니다.”
라우렐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다소 기운 없는 투로 내뱉고 루이제와 함께 연회장을 떠나갔다.
루이제가 연회장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프레사를 잠깐 돌아보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마 조금 늦은 감사 인사인 듯했다.
프레사는 마주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레사.”
“레사 님.”
리카온과 제드가 동시에 프레사를 불렀다.
프레사는 그제야 그들에게 눈길을 던지며 방긋 웃어 보였다.
“어쨌든 무사히 상황을 정리했네요. 두 분 다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같이 일했다고 손발이 꽤 잘 맞았던 거 같죠?”
프레사의 말투는 꽤 가벼웠으나 이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리카온과 제드의 분위기가 영 무거워서 조금 환기할 필요성을 느꼈을 뿐이었다.
제드가 힐끔 리카온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런데 정말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까요?”
“네, 만들 수 있어요.”
“레사 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겠죠. 어쨌든…… 안심입니다.”
제드는 작게 한숨을 토했다.
그동안 걱정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하긴, 제드가 아니었다면 프레사는 황제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리카온이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프레사는 자연스럽게 리카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카온은 다소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프레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마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네, 돌아가서 치료제를 조금 더 연구해야겠어요.”
“오늘은 좀 쉬고 내일부터 시작해요. 당분간 다른 일정은 없을 테니까.”
리카온은 느긋한 걸음으로 프레사를 이끌어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정말 약혼이라도 한 사이처럼 다정해 보였다.
연회장에는 그새 잔잔하고 차분한 연주곡이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프레사는 리카온의 팔에 손을 얹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춤추자고 안 하시네요?”
“……추고 싶습니까?”
“아뇨, 그럴 기력은 없어요. 그냥 놀리고 싶어서요.”
프레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리카온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프레사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한 농담이에요, 리카온 씨.”
리카온이 뚫어질 듯 프레사를 빤히 응시하더니 픽 웃었다.
“걱정 안 합니다. 나는 당신을 믿으니까.”
프레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리카온은 종종 지나치게 솔직해서 프레사를 당황하게 했다.
바로 지금처럼.
하지만 못 들은 척하고 싶지도, 장난으로 치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리카온의 신뢰는 진심이었으므로.
프레사는 옅게 미소 지으며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네, 저도 당신을 믿어요.”
주고받는 신뢰의 소중함을 알아버렸기에, 프레사 역시 리카온이 무엇을 하든 믿을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