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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9화 (69/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69화

프레사는 리카온이 꽤 긴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작 약을 마시는 라우렐은 도리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물론 제대로 잠을 못 잤는지 눈 밑이 퀭하기는 했지만.

사실 약효가 나타나는지 아닌지 눈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마력이 진정되고 있다. 마탑주도 아마 눈치챘겠지.」

“파동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아닌 프레사를 대신해 리스와 리카온이 연달아 라우렐의 상태를 간략히 설명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군요.”

라우렐 또한 본인의 몸이니 변화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가 창백하게 질리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폐하?”

리카온이 라우렐을 불렀으나 라우렐은 대답하지 못했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괴로워할 뿐이었다.

프레사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리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죠?”

「……글쎄다. 무언가 토하려는 것 같은데.」

리스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지나치게 차분했다.

“우, 욱…….”

다행히 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우렐이 바닥에 엎드리더니 새카만 것을 토해냈다.

프레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둘러 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내 담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리카온이 라우렐을 부축해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다행히 검은 덩어리를 뱉어낸 라우렐은 한결 편해 보였다.

“괜찮아, 리키. 그런데 저건…….”

라우렐은 아까보다 더 체력이 떨어진 낯으로 프레사가 붙잡은 새카만 덩어리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리스가 조금 전과 달리 한껏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지난번의 그것이구나. 세계수의 뿌리에서 온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폐하, 혹시 세계수의 뿌리에 다녀오신 적 있으신가요?”

프레사의 질문에 라우렐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유를 모르겠으나 리카온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프레사는 그의 작은 행동만으로도 그가 뿌리에 간 적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라우렐은 마땅한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리카온 씨와 관련이 있는 건가?’

리카온, 세계수의 뿌리, 모든 생명의 근원지.

아. 프레사는 그제야 라우렐이 왜 망설이는지 알 것 같았다.

‘리카온 씨의 용독을 치료할 방법이 없는지 찾으러 갔던 거야.’

그것도 황제인 라우렐이 누군가를 보내지도 않고 직접.

그럼 라우렐이 갑자기 마력 중독증을 앓게 된 게 리카온이 프레사를 만나기 이전이라면, 증상은 꽤 천천히 발현한 셈이었다.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증상이 늦게 나타난 모양이구나. 저 검은 덩어리는 요정과 마법사에게 격렬히 반응하는 것 같다. 보거라.」

새카만 덩어리는 유리병 벽에 딱 달라붙어서 리카온 쪽으로 가려는 듯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 그게 무슨 뜻입니까? 폐하께서 왜 그곳에…….”

리카온이 살짝 눈썹을 찡그린 채 프레사가 든 유리병 속을 바라보았다.

라우렐은 여전히 이유를 말할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

프레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고자 했다.

“일단 이유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이 덩어리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해요. 리카온 씨한테 아직 말하지 못했지만, 케이드 씨 역시 이런 덩어리를 토한 적이 있거든요.”

“그 길드 마스터가?”

“네. 케이드 씨 역시 세계수의 뿌리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어요. 이후에 증상이 나타났고요. 황제 폐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지만요.”

리카온은 프레사의 설명을 듣더니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의 뿌리라면 요정들이 사는 곳 아닙니까? 인간은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리카온의 의문은 황제라고는 해도 평범한 인간의 몸을 지닌 라우렐이 어떻게 뿌리까지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프레사와 리스가 동시에 라우렐을 쳐다보았다.

이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으므로.

세 명의 시선을 한 번에 받게 된 라우렐이 결국 두 손을 살짝 들어 항복을 알렸다.

“이실직고할게, 리키.”

“말씀하십시오.”

“어쩌다 보니 그 근처까지는 갔었어. 어떻게든 네 용독을 치료해 주고 싶어서. 하지만…… 역시나 입구에서 더 다가가지 못했지.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 다르기는 하더라.”

라우렐은 뿌리에 닿기만 했을 뿐 마을로 들어서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몰라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무언가…… 엉망인 느낌이었어. 내가 지금껏 배우고 상상했던 뿌리는 평화롭고 따스한 곳이었는데, 어둡고 눅눅한 기분이 들었어. 더는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아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라우렐의 말이 끝나고 나서 프레사는 잠시 리스를 응시했다.

리스의 털 색이 그새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무척이나 우울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어. 리스 님은 능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이 상태로는 세계수에 닿을 수 없으니까.’

기분이 별로인 사람은 리스뿐만이 아니었다.

리카온 역시 전혀 몰랐던 사실에 당황한 눈치였다.

“왜 이제까지 저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거기서 이런 병을 얻어 올 줄은 몰랐어.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리키. 너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어. 짐을 더 얹어주기도 싫었고.”

리카온은 라우렐의 사과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형제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일 터였다.

라우렐은 리카온을 홀로 드래곤과 대적하게 한 것부터 아마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리카온이 죽을 뻔했으니까.

프레사는 두 형제의 대화를 잠자코 들으며, 소프 가문에서의 자신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소프 백작 부부가 나를 제국에서 데려왔다고 했지.’

혹시 제국에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프레사를 기억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을 찾을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밖에 더 되겠는가.

프레사는 쓸데없는 희망을 지워버리고, 한동안 흐르던 어색한 침묵을 깨트렸다.

“마력이 완전히 안정되려면 당분간은 푹 쉬어 주셔야 해요, 폐하. 그럼 저는 이만 마탑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덩어리를 살펴볼 겸이요.”

리카온과 라우렐이 프레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고생했습니다, 레사. 데려다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두 사람이 형제간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도록 두고, 마탑으로 가겠다는 말이었는데 리카온은 금방이라도 프레사를 따라올 눈치였다.

하여튼 등을 떠밀어 줘도 받아먹지를 못하는 걸 보면 리카온도 이런 쪽으로는 미숙했다.

“스크롤만 하나 주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으니까요. 두 분께서 나눌 대화가 많으실 것 같아 자리를 비켜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프레사가 결국 돌려 말하기를 포기하고 속내를 고스란히 내뱉자, 리카온이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리카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콕 찌른 프레사는 내려놓았던 화분과 짐가방을 챙겨 들었다.

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화분으로 날아와 아무런 말 없이 이파리 사이에 몸을 숨겼다.

‘한동안 또 우울해 계시겠네. 걱정이야.’

걱정스러운 눈으로 화분을 내려다본 프레사가 한 걸음 내딛는데, 이번에는 라우렐이 프레사를 불러 세웠다.

“프레사, 황실 약제부의 수습 약사로 일해 볼 생각은 없어요?”

“……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에 프레사는 영 어벙하게 되받아치고 말았다.

라우렐은 방금 큰일을 겪은 사람치고는 아주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덧붙였다.

“황실의 정식 약제사가 될 기회를 주고 싶어서요. 프레사 정도의 인재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고, 제국의 미래에도 분명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물론 부담은 느끼지 말아요.”

“약제부에 들어가서 조금만 배우면 분명 국가시험도 거뜬히 통과할 겁니다.”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긴 줄 알았던 리카온이 갑자기 라우렐의 의견을 거들고 나섰다.

라우렐은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부담스러움과 기쁨이 반반이었다.

필츠 여왕이 제안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이었다.

칸체르 제국의 황실 약제사라니.

심지어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않아도 곧장 배울 기회를 준다면, 프레사에게는 시간적으로도 이득이었다.

‘그리고…….’

프레사는 더듬이의 털만 살짝 튀어나온 리스를 잠깐 바라보았다.

아이작이 연구해 보겠다며 첫 번째 덩어리를 챙겨가긴 했지만, 어쩌면 리스와 함께 있는 프레사가 더 빨리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리스가 완전히 힘을 되찾았을 때 필요한 정보를 먼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황실의 약제사가 된다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지금과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많을 것이다.

‘리스 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으니까.’

프레사는 마침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고민을 끝냈다.

“제안해 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폐하. 언제부터 출근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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