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71화
늦은 오후가 되니 비가 그치고 그새 하늘이 맑게 개었다.
클로가 주고 간 빵을 먹으며 책을 몇 권 더 읽었더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프레사는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찌뿌둥한 두 팔을 위로 쭉 뻗은 후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곧장 방으로 밀려 들어왔다.
“리스 님, 날씨가 맑아졌어요.”
「……그래. 그렇구나.」
리스는 오전보다는 조금 기분이 나아졌는지 먹구름처럼 시커멓던 털 색은 이제 옅은 재색이었다.
화분과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것도 그만두고 창문에 앉아 가만히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프레사는 그가 바닷바람에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해 적당히 환기한 후 창문을 닫았다.
생각해 보니 프레사의 방에 화분은 파로 마을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적었다.
‘식물이 적은 영향도 있는 게 분명해.’
다행히 프레사는 마탑에서 식물이 가장 많은 곳을 이미 알고 있었다.
프레사는 닫힌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리스의 정수리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톡톡 두드렸다.
“리스 님, 약제실에 모셔다드릴까요?”
「그래, 고맙구나.」
리스가 포르르 날아와 프레사의 어깨 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
프레사는 곧장 약제실로 향했다.
수십 개가 넘는 화분과 식물로 가득한 약제실은 넓은 창을 통해 밝은 햇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리스는 약제실에 도착하자마자 프레사의 어깨를 떠나 식물 쪽으로 날아갔다.
밝은 빛 때문인지 아니면 상태가 좋아진 건지 몰라도, 리스는 아까보다 조금 더 환해 보였다.
“언제 모시러 오면 될까요?”
「저녁 먹기 전이면 괜찮을 것 같다. 확실히 식물이 많으니 기분이 나아지는구나.」
“네, 그럼 늦지 않게 올게요.”
리스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사는 리스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서둘러 약제실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두세 번 밟자 곧 다시 방 앞이었다.
아이작에게 연락해 다음 주 물량을 미리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사.”
“아, 리카온 씨. 무슨 일인가요?”
프레사는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리카온이 두어 계단 아래에 멈춰 선 채로 프레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편안한 옷차림이었는데, 꼭 파로 마을에서 지낼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헐렁한 흰색 셔츠 틈으로 그의 곧은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늘은 마탑 안내를 해주고 싶어서. 시간 괜찮습니까?”
“마탑 안내…… 관광 같은 건가요?”
마탑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지만, 프레사는 아직 마탑이 어떤 곳인지 확실히 알지는 못했다.
돌아다녀 본 곳이라고는 기껏해야 도서관, 리카온의 방, 약제실, 공용 휴게실 정도가 다였다.
이제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으니 리카온도 여유가 나는 모양이었다.
리카온은 프레사의 질문에 고개를 가볍게 한번 까딱였다.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이죠. 아직 당신에게 보여주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좋아요. 마침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기로 한 날이었거든요. 잠시만요.”
잠시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온 프레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잘 빗어 정돈한 다음 하나로 높게 올려 돌돌 말아 묶었다.
잔머리가 옆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지만, 지저분해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망토를 한참 바라보았다. 망토는 여러 벌이었는데 하늘색과 보라색 그리고 검은색이었다.
잠시 고민한 프레사는 그녀의 머리카락보다 조금 짙은 보라색 망토를 골라 걸쳤다.
밖으로 다시 나오자 리카온이 어느새 바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가 곧장 프레사를 바라보았다.
“가실까요, 아가씨.”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프레사가 리카온의 팔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리카온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프레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낯간지럽습니까?”
프레사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의 손을 살짝 맞잡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네. 리카온 씨가 부르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다른 사람이 부르면 괜찮고?”
프레사는 짧게 고민한 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 전부 다는 아니에요. 어쨌든 리카온 씨가 부르면 놀리는 것 같고 그래요.”
“사실 그런 의도가 담긴 건 맞습니다만.”
리카온이 뻔뻔하게 되받아치자 프레사가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하여튼 짓궂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가깝게 느껴지기야 했지만.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프레사는 그가 가는 방향 그대로 따라 움직이며 물었다.
“오늘은 위쪽으로 가는 건가요?”
“네, 가장 위층에 갈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탑의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프레사는 순간적으로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득한 수백 개의 계단만이 보일 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겪어도 정말 신기한 곳이었다.
저 수많은 계단을 다 밟고 올라왔다면 프레사는 지금쯤 바닥에 드러누웠을 것이다.
리카온이 프레사를 난간 쪽으로 슬쩍 당겼다.
프레사는 아무 저항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벽돌로 쌓아 올린 난간 밖으로 푸르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느덧 해가 수평선 너머로 절반쯤 잠긴 채였고, 사방이 붉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적당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프레사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름답네요. 이것도 마법은 아니죠?”
프레사는 멍하니 처음 보는 풍경을 내려다보다가, 리카온을 돌아보며 장난스레 물었다.
리카온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다가 조금 뒤늦게 되물었다.
“마법을 써 보고 싶지 않습니까?”
리카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프레사는 그를 슬쩍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기는 해요.”
“그럼 써 보면 될 일이죠.”
“네? 전 마법사가 아니잖아요, 리카온 씨.”
“누가 그래요?”
리카온이 픽 웃었다.
프레사의 눈동자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사람을 놀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리카온이 불쑥 프레사의 뒤로 몸을 바짝 붙였다.
당황할 새도 없이 곧 그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나른하게 들려왔다.
“손, 줘요.”
프레사는 얼떨결에 오른손을 위로 살짝 들었다.
리카온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듯 잡았다.
“힘 빼고.”
“대체 뭘 하시려고…….”
프레사의 말이 뚝 끊어졌다.
리카온은 마치 그녀의 손으로 연주를 하듯 섬세하게 허공을 내리그었다.
프레사는 곧 눈을 크게 떴다.
리카온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별이 피어나고 있었다.
프레사가 마법을 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리카온이 그녀의 손으로 마법을 부리는 것이지만.
노을이 진 하늘과 바다 사이로 프레사의 손이 만들어 낸 별이 눈처럼 쏟아졌다.
제 손가락 끝에서 반짝반짝 별이 퐁, 퐁 새어 나오는 것이 제법 아름다웠으므로 프레사는 나직이 감탄했다.
한참이나 프레사의 손을 지휘하듯 부드럽게 움직이던 리카온이 나직이 속삭였다.
“어때요, 마법.”
“……사기꾼 같아요, 리카온 씨.”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 봤자 신뢰가 안 가는데.”
“사실 무척 신기하고 즐거워요. 진짜 마법사가 된 것 같았어요.”
고마워요, 리카온 씨. 감사를 표하는 말이 뒤이어 나왔다.
리카온은 언제나처럼 ‘별말씀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더니 프레사의 손을 놓아주었다.
사방에 흩날리던 별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토록 찰나였기에 정말 마법 같은 순간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프레사는 흐려지는 별의 흔적을 따라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리카온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다음은 어딜 보여 주실 거예요?”
기대하라는 말을 짤막이 내뱉은 리카온은 프레사를 마탑 이곳저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프레사의 약제실보다 훨씬 넓고 화려한 온실, 수상한 무언가가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지하, 마법사들이 중요한 일을 토론할 때 사용하는 회의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마탑 밖의 해변이었다.
두 사람은 고운 백색 모래 위를 나란히 걸어가며 어둠이 까무룩 내려앉은 밤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파도가 바로 발치까지 들어왔다 나가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어쩐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리카온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꽤 오래도록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프레사는 망토를 조금 더 여미며 발자국이 남은 모래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리카온이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후회요?”
“제국에 남기로 한 결정 말입니다.”
아.
프레사는 리카온이 왜 오늘 굳이 시간을 내서 프레사와 오후를 보냈는지 알 듯했다.
리카온은 프레사가 막상 황실 약제사가 되기로 하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마주 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전혀요. 제가 리카온 씨 때문에 남기로 한 것 같으세요?”
“그 이유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기는 싫습니다.”
그 말은 결국 프레사가 리카온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둬서 남겠다고 결정했으면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카온 씨 말 그대로예요. 아예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전부 리카온 씨 때문인 건 아니에요. 저를 위해서라는 이유가 가장 크고요. 그리고 리카온 씨.”
프레사는 걸음을 멈추고 리카온의 한 손을 제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듯 쥐었다.
“제가 마탑에 신세 지는 게 더 신경 쓰일 뿐이에요.”
“당신 집처럼 생각하라니까요.”
“이미 거의 집처럼 돌아다니고 있기는 하죠.”
프레사가 장난스럽게 대꾸하고 바다를 돌아보았다.
“저는 황실에서도 잘 적응할 거예요. 그게 제 가장 큰 장점이거든요.”
프레사는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조그맣게 내뱉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여러모로 그 말을 되새기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