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72화
일단 황실 수석 약제사의 첫인상은 아주 별로였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는 해도 이 남자, 그러니까 수석 약제사이자 앞으로 프레사가 따를 상관은 안면 가득 오만함이 가득했다.
프레사를 깔보고 있다는 걸 척 봐도 알 수 있었는데 이건 모두 소프 가문 사람들 덕분이었다.
“당신의 상관인 엘리엇 루퍼트다. 수석 약제사님이라고 부르도록.”
“네, 수석 약제사님.”
프레사는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웃기기까지 했다.
엘리엇 루퍼트는 딱 봐도 재수 없음이 철철 묻어나오는 남자였다.
제드가 미리 알려 준 정보에 따르면, 루퍼트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석 약제사를 연임해 왔다고 한다.
그러니 콧대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심지어 보조 약제사 중에 엘리엇의 아들이 있는데, 당연히 미래의 수석 약제사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약제사 시험은 난도 자체도 무척 높아서 통과하기 쉽지 않다고 하니 다들 동료이자 경쟁자인 관계였다.
프레사는 오랜만에 비즈니스용 미소를 짓고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엘리엇은 못마땅한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쯧. 제국의 인재도 많은데 왜 필츠 왕국에서……. 이래서 근본 없는 낙하산 놈들은…….”
음, 아무런 타격도 없는 발언이라서 프레사는 하마터면 하품을 토할 뻔했다.
‘어제 잠을 너무 못 잤나? 그러고 보니 퇴근 후에는 치치 상처를 좀 보러 갈까. 빵을 그렇게 받았으니 가만히 있기는 좀 그렇지.’
프레사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며 엘리엇이 내뱉는 말을 모조리 무시했다.
인사를 나눈 후 각자 할 일을 바쁘게 하고 있던 약제사들이 힐끔힐끔 프레사를 쳐다보았다.
대부분 쌤통이라 생각하는지 잘됐다고 여기는 눈빛이었다.
그들에게도 프레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심지어 황제의 추천을 받고 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을 테니 더 그럴 것이다.
‘소문이 아니라 진짜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왕국 출신의 정체 모를 보조 약제사, 추천인은 칸체르의 황제.
‘적을 만들기에 제격인 조합이지.’
가장 먼저 만든 적은 유감스럽게도 수석 약제사인 모양이었다.
“첫날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거기에 서 있도록 해.”
“네, 수석 약제사님.”
프레사는 군말 없이 대꾸하고 얌전히 서 있었다.
다리야 좀 아프겠지만, 눈으로 이들이 무슨 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지 확인할 기회였다.
엘리엇은 프레사가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껴 돌아갈 줄 알겠지만, 아쉽게도 프레사는 이 정도 괴롭힘에는 너무 익숙했다.
‘내가 살다 살다 소프 남매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날이 오다니.’
프레사가 고분고분하게 서 있기만 하자, 괜히 근처를 서성거리던 엘리엇이 혀를 차며 멀어졌다.
프레사는 눈동자를 굴려 보조 약제사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았다.
주로 약제와 물품 정리 정돈, 영수증 검수, 바닥 청소, 설거지 정도였다.
그리고 몇 명은 정식 약제사의 보조를 맡고 있었다.
보조라고 해 봤자 약초를 빻아서 주기 같은 자잘한 일이었지만.
‘약제부는 인원이 많지 않구나.’
약제부실에 현재 있는 사람은 수석 약제사를 포함해 열다섯 명 정도였다.
하긴 대량으로 물품을 생산할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적당한 편이었다.
‘혼자서 거래 물량을 준비하는 내가 이상한 거지.’
오늘 퇴근하고 돌아가면 또 내 집 마련 길드로 보낼 약을 만들어야 했다.
‘돈을 버는 건 좋은데 물량을 채우기가 좀 빡빡하네.’
리스 덕분에 약을 만드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약을 끓이고 식히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대량 공급은 혼자 힘에 버거우니 소량씩 정해진 양만 판매하는 쪽으로…….
프레사가 우뚝 서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작고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프레사…….”
“네?”
“저 약장 뒤쪽에 의자가 있어요. 거기서 이거 읽고 오실래요?”
크고 동그란 안경을 쓴,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옅은 하늘색의 로브를 입은 정식 약제사였다.
로브에 달린 이름표를 확인하니 카를라 리베라는 이름이었다.
프레사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벌써 정식 약제사가 된 거면 꽤 재능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프레사는 그녀의 옅은 갈색 눈을 마주 보고 있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정식 약제사가 되는 법: 진정한 약제사란?>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이었다.
정말 이 책이 앞으로 일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려는 의도인 듯했다.
프레사는 책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고마워요, 약제사님.”
“아, 편하게…… 카를라라고 불러 주세요.”
카를라는 약제사님이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웠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후다닥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프레사는 그녀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책장 뒤는 아무도 없었는데 정말 한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 자주 사용했는지 여기저기 낡은 소파였지만, 프레사에게는 지금 당장 필요한 유일한 휴식처였다.
프레사는 냉큼 소파에 앉아서 카를라가 준 책을 펼쳤다.
‘음, 역시 별 내용은 없구나.’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를 이리저리 꼬아서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은 책이었다.
프레사는 몇 장 읽다 말고 책을 덮었다.
소파 바로 옆에는 작은 창문이 나 있었는데, 황성의 정원이 살짝 보이는 위치였다.
일단 오늘은 첫날인 만큼 되도록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로 했다.
즉 엘리엇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퇴근할 예정이었다.
프레사는 고개만 살짝 빼내서 반대쪽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퇴근까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프레사는 소리를 내지 않고 하품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서 있었다.
엘리엇이 그녀를 감시하려는 듯 자꾸 왔다 갔다 했지만, 프레사가 정말 목석이라도 된 듯 가만히 서 있자 나중에는 구석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했다.
결국 프레사는 퇴근할 때까지 카를라가 알려준 소파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