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73화
프레사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붙잡아 부축했다.
“괜찮으신가요?”
“아……. 요즘 황제 폐하 걱정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아이리스는 그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미소 지었다.
소중한 사람이 앓게 되면 주변 사람도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프레사는 아이리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거 드시면 조금 나을 거예요. 다음에는 수면에 좋은 약차를 챙겨 드릴게요.”
프레사는 가방을 뒤적여 박하수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이리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박하수를 응시하더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챙겨갔다.
아이리스는 딱 봐도 가냘픈 인상이었기에 영 걱정스러웠다.
‘혼자 가게 둬도 괜찮으려나.’
프레사는 아이리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갑자기 퍼뜩 떠오른 생각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리카온 씨와 만나기로 했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어.’
퇴근 후에 리카온과 만나서 같이 돌아가기로 한 것을 그새 까맣게 잊어버렸다.
리카온은 마탑의 주인답게 좌표 지정 스크롤을 사용하지 않아도 마탑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러니 그와 함께 간다면 굳이 어지러운 스크롤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프레사를 허둥지둥 낯선 복도를 내달려서 간신히 리카온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바로 처음 황성에 왔을 때 들어갔던 작은 문이었다.
“리카온 씨!”
리카온이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프레사는 손을 크게 붕붕 흔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카온이 천천히 몸을 틀어 그녀를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렇게 뛰어옵니까? 어차피 지각인데.”
리카온은 종종 이렇게 뼈를 때리곤 했다.
프레사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오다가 오렌 후작 영애님을 만나는 바람에 조금 늦었어요. 미안해요.”
“오렌 후작 영애를?”
“네,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거든요. 황제 폐하의 치료제를 만들어준 일로. 그런데 오렌 후작 영애님은 지병 같은 건 없나요?”
프레사의 질문에 리카온은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왜요?”
“아, 황자 폐하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으셨는지 최근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하셔서요. 약차를 챙겨 드리기로 했어요.”
“……챙길 사람도 많네요, 참.”
리카온이 다소 불퉁하게 중얼거리더니, 프레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오른손을 허공에 내리그었다.
작은 원형의 공간이 나타나더니 점점 커져서 리카온이 들어갈 만한 크기가 되었다.
프레사는 리카온의 반응에 눈만 깜빡였다.
“리카온 씨 혹시 서운하세요?”
리카온은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하느라 프레사를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입까지 바쁜 건 아니었기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서운한 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될 뿐입니다.”
“약차 몇 개 준다고 해서 할 일이 늘어나는 건 아닌걸요.”
“그게 다른 일을 불러올 수도 있는 법이죠. 늘 그랬듯. 먼저 들어가요, 레사.”
리카온은 꽤 단호하게 되받아치더니, 공간 안으로 고갯짓했다.
프레사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먼저 성큼 발을 내디뎠다.
어느새 익숙해진 마탑의 풍경이 시야를 채웠다.
프레사는 방금 그녀가 떠나온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리카온이 막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황성과 마탑을 이어주던 길은 그가 통과하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프레사는 리카온을 빤히 올려다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리카온 씨는 저를 너무 좋아하시네요. 좋아해야 걱정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걸 지금 알았습니까?”
어라, 이런 반응을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프레사가 잠시 당황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프레사.”
“무슨 짓이지, 클로.”
그러나 리카온이 먼저 막아서는 바람에 허공만 짚을 뿐이었다.
“클로 씨?”
프레사는 앞을 완전히 가린 리카온의 몸통을 슬쩍 피해 나오며 클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은체하자 리카온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보라색 눈동자 위로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둘이 어떻게 아는 겁니까?”
“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프레사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 간단히 대꾸하고 클로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일인가요?”
“그 약, 그거 더 줘.”
“약?”
“몸이 가벼워지는 약.”
“아.”
클로가 말하는 약은 다름 아닌 박하수였다.
역시 한 번도 마시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마시는 사람은 없는 기특한 자양강장제 박하수.
프레사는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은 가진 게 없고 나중에 받으러 오세요. 대신 이제부터는 약값을 받을 테니 돈도 챙겨 오셔야 해요.”
“……돈?”
클로는 돈이라는 말에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설마 영원히 공짜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네, 돈이요.”
프레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클로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잠시 후 클로가 느린 말투로 질문했다.
“얼마나?”
“비싸진 않아요. 빵 하나의 가격 정도?”
“……알았어.”
빵 하나의 가격이라고 하니 괜찮은 모양이었다.
순순히 대답한 클로는 프레사와 리카온을 한 번씩 번갈아서 보더니 이내 저벅저벅 반대쪽으로 멀어졌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클로 씨가 저를 먼저 찾아온 것뿐이에요. 클로의 반려 늑대 치치가 다쳐서 약이 필요하다더라고요.”
클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레사가 힐끔 리카온의 눈치를 살피며 말문을 열었다.
리카온은 이상하리만치 심각한 얼굴이었다.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었나?’
리카온은 프레사의 말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침묵했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니 프레사 역시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물어보려는데 리카온이 먼저 말했다.
“앞으로 클로와 단둘이 만나지 마십시오, 레사. 약속해요. 클로에게도 말해 두겠습니다.”
이유 정도는 말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리카온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너무 차가웠기에 프레사는 결국 그러겠노라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