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75화
프레사는 따뜻한 약차를 끓여 내왔다.
리카온은 별다른 말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묘하게 긴장한 듯 보여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프레사는 약차가 담긴 찻잔을 리카온 쪽에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아, 차 고맙습니다.”
새삼스러운 인사를 들으니 리카온은 참 예의 바른 사람이구나, 싶었다.
프레사는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곧 리카온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폐하께서 전해 달라고 하신 내용입니다. 물론 저도 동의했기에 말을 꺼내는 거고.”
“폐하께서요?”
라우렐이 전하라고 한 이야기면 꽤 중요한 일일 터였다.
프레사는 나직이 되묻고서 이내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리카온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국으로 망명하는 건 어떻습니까? 새로운 가문을 받아서 제국의 국민이 되는 거요.”
“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이라 프레사는 입을 살짝 벌리고 눈만 깜빡였다.
황실의 약제사가 되겠다는 생각만 했지, 막상 제국에 소속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어차피 필츠 왕국에서의 목적은 다 이뤘으니 이곳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리카온이 짤막이 사견을 덧붙였다.
확실히 프레사는 왕국으로 돌아갈 일도, 소프 가문의 이름을 다시 쓸 일도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귀족에게 가문을 떠난다는 건, 그리고 가문의 이름을 버린다는 건 꽤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프레사는 가문에 일말의 정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리는 데에 큰 고민이 없었지만, 막상 제국에 와서 지내니 불편한 점이 있기는 했다.
모두가 그녀의 가문을 궁금해했지만, 알려줄 수 없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그럼 폐하께서 직접 새로운 가문의 이름을 내려주시는 건가요?”
“사실, 아예 새로운 이름은 아닙니다.”
리카온은 어째서인지 조금 머뭇거렸다.
“아예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면 기존에 존재했던 가문의 이름이에요?”
뭐, 몰락 가문의 이름이라거나 아니면 대충 다른 가문의 방계에 넣어주는 걸지도.
프레사가 대충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데 리카온이 조그맣게 내뱉었다.
“……그레나딘입니다.”
“……네?”
지금 뭐라고요?
프레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카온을 쳐다보자, 리카온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리고 침착한 말투로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프레사 그레나딘이 되는 겁니다. 물론 가문의 이름을 사용하려면 결혼이나 입양 같은 절차가 필요하지만, 내가 당신의…… 정식 후견인이 되면 제국법상 가능합니다. 지금 당신은 나와 약혼한 사람이니 다들 결혼 전 당신을 보호하려는 조치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런 일이 아예 없던 일도 아니고요.”
뒤이은 리카온의 말에 따르면 종종 귀족이 평민 출신의 연인과 결혼하기 전, 가문의 이름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의미로 먼저 가문의 이름을 주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프레사는 평민 출신은 아니지만, 가문이 사라졌고 프레사가 그 이름을 버렸기에 거의 비슷하기는 했다.
“음. 조금 낯간지럽기는 하네요.”
잠자코 리카온의 말을 듣고 있던 프레사가 산뜻하게 내뱉고서 방긋 웃었다.
리카온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긴장한 얼굴이었다.
프레사가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일부러 느긋하게 찻잔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그러자 리카온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재차 입을 열었다.
“레사,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정말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니까…….”
“좋아요.”
“……좋다고요?”
“네, 프레사 그레나딘. 꽤 멋있잖아요.”
이번에는 리카온이 어벙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정말…… 괜찮습니까?”
“네. 그리고 왕국에 돌아가 봤자 안 좋은 일만 떠오를 테고, 전 제국이 꽤 마음에 들어요.”
수석 약제사와 그 아들만 제외하면 프레사는 무척 즐겁고 편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정식으로 제국에서 프레사를 받아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프레사는 태어난 곳도 제국이지 않은가.
프레사는 이 이야기를 리카온에게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을 퍼뜩 깨닫고 말했다.
“사실 저도 리카온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네, 편하게 말해요.”
“제가 소프 가문의 입양아였대요.”
리카온은 아주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프레사의 예상처럼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프레사를 똑바로 마주 보며 미간만 살짝 좁혔다.
“……별로 놀랍지는 않네요. 그들과 당신은 전혀 닮지 않았으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어렸을 때 저를 제국에서 데려왔다나 봐요.”
이번에는 리카온도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제국에서? 그럼 고향이 칸체르란 말입니까?”
“네. 제국 땅이 워낙 넓으니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친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프레사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질문을 던졌다.
친부모를 만나게 되면 묻고 싶은 게 꽤 많았다.
어쩌다 프레사를 소프 백작 부부에게 넘기게 된 건지, 혹은 프레사를 버린 건지 아니면 잃어버린 것인지 같은 뻔한 내용이었다.
따지고 보면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영영 마음속에 의문으로 남기는 것보다는 어떤 대답이든 확실히 듣는 편이 나았으니까.
리카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세월이 너무 지나서 확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친부모가 궁금하다면 제가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프레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제롬이 말해 준 내용에 따르면 아마 제가 3, 4세쯤이었나 봐요. 저 빼고 다른 가족은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차별했겠지만.”
“그런데 소프 백작 부부가 당신을 입양한 이유가 뭐였답니까?”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롬이 알려 준 거라서요. 아마 소프 남매들도 어렸을 때니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지 못할 거예요.”
“확실히 그렇네요. 당신도 어린아이였으니까. 당신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군요.”
리카온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라도, 갑자기 허공을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설마 어렸을 때 내 모습 같은 걸 떠올리는 건 아니겠지?’
불현듯 그런 황당한 추측을 한 프레사가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 휘휘 흔들며 말했다.
“정확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소프 백작 부부를 만나야 하는데, 백작은 감옥에 있고 백작 부인은 의식불명이니 힘들죠. 가문에서 오래 일했던 집사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그쪽도 행방이 묘연해요.”
리카온이 흔들거리는 프레사의 손가락을 응시하더니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집사 한 명을 찾는 일이라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나에게 맡겨요.”
“고마워요, 리카온 씨. 이왕이면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으면 해요.”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찾아주는 길드도 있다고 들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었다.
만약 프레사의 친부모가 아직 제국에서 지내고 있고, 프레사가 그들을 찾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서로 꽤 곤란해질 테니까.
하지만 프레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알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그들과 다시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고 이미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되었으니 없던 가족애를 되살리기도 힘들 것이다.
그냥 어쩌다 프레사를 놓아버렸는지, 왜 그런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게 두었는지 묻고 싶을 뿐이었다.
그 질문의 답만 찾을 수 있다면 이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것도 그들이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프레사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은 약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다른 주제로 대화를 환기했다.
“아, 그리고 제국에서 사업은 좀 더 나중에 시작할까 해요.”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리카온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프레사를 응시했다.
프레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그것보다는 할 일이 너무 많잖아요. 배워야 할 것도 많고요. 당장 돈이 급한 건 아니니 내 집 마련 길드에 보낼 물량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그레나딘 상단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
리카온은 이번에도 흔쾌히 프레사의 생각을 이해해 주었다.
어쩌면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종종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카온은 프레사가 내뱉는 말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받아들였다.
이러다 리카온의 호의에 너무 익숙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까지 했다.
리카온은 겉보기와 다르게 사람이 너무 무르고 다정했다.
물론 그런 그가 좋은 거지만.
프레사는 나직이 ‘순둥이.’하고 중얼거렸지만, 들리지는 않을 만큼 작아서인지 리카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리카온이 불쑥 질문을 꺼냈다.
“그나저나 곧 건국제라는 걸 알고 있습니까?”
“건국제요?”
“네. 약제부도 그때 휴가 기간이라고 들었는데, 괜찮으면 나와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약제부 휴가라니.
‘그 수석 약제사, 일부러 나한테 말 안 해준 거 아니야?’
프레사는 엘리엇에게 미처 듣지 못한 휴가 얘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어지는 리카온의 말에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제 프레사도 제국 사람이 될 테니, 처음 맞이하는 건국제를 즐겨 보고 싶었다.
“그런데 리카온 씨, 데이트 신청인가요?”
프레사는 예전에 리카온이 했던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리카온의 귓불이 살짝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아닐 리가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