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77화
리카온은 마도구를 사용해 배를 움직이는 대신, 프레사를 안고 날아오르는 쪽을 택했다.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프레사는 얌전히 그에게 안긴 채 아이리스에게 도착했다.
아이리스는 바닥에 쓰러져 새하얗게 질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프레사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지나가 아이리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체온은 확연히 높았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열사병 증상이에요. 당장 물을 먹이고 시원한 곳으로 옮겨야 해요.”
프레사는 리카온을 돌아보며 차분하게 내뱉고서 가방에서 박하수를 꺼냈다.
열사병에 효과를 보이지는 않지만, 일단 물 대신 먹일 생각이었다.
급하다고 지저분한 호숫물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이리스, 제 말 들리세요?”
아이리스가 프레사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완전히 의식을 잃은 건 아니었다.
“대공 전하? 프레사 님? 무슨 일입니까?”
때마침 순찰 중이었는지 이 더운 날씨에도 갑옷을 무장한 루이제가 다가와 물었다.
“아, 페놀 경. 아이리스가 열사병으로 쓰러졌어요.”
“제가 의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루이제는 망설임 없이 아이리스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프레사는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리카온을 향해 말했다.
“저도 다녀올게요, 리카온 씨. 혹시 약이 더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리카온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난 황제 폐하께 다녀오겠습니다.”
“네, 이따 봐요.”
프레사는 리카온의 눈을 마주 본 후에 서둘러 루이제의 뒤를 따라갔다.
발에 꽉 끼는 구두가 불편해서 프레사는 급기야 신발을 벗어들었다.
루이제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아무리 초가을이라고 해도 아직 한낮은 무더웠기에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나름 체력을 기른다고 기른 프레사도 숨이 턱까지 찼는데 루이제는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었다.
‘역시 황실 기사는 다르구나.’
프레사가 내심 감탄하는 사이, 그들은 황실 의원에 도착했다.
다행히 대기 중이었던 신관이 바로 조치했기 때문에 아이리스는 금세 원래의 안색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진단은 프레사가 예상했던 대로 일사병이었다.
그리고 수면 부족은 덤이었다.
‘약차로는 별 소용이 없는 걸까.’
프레사는 신관의 치유력으로 평온해진 아이리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황제 폐하의 치료제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아직 못 드렸군요.”
옆에 서 있던 루이제가 프레사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프레사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별말씀을요. 감사 인사는 충분히 들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페놀 경.”
루이제는 무뚝뚝한 얼굴 위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늘 딱딱한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러웠다.
하긴, 감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숨기고 지낼 뿐이다.
라우렐이 좋은 황제이자 사람이었기에, 리카온도 루이제도 아이리스도 모두 그토록 본인의 일처럼 걱정했을 것이다.
프레사가 처음 약제사가 되기로 했을 때, 누군가를 돕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게 약제사였다.
하지만 어느새 이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프레사는 다시 아이리스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아이리스는 많이 약해 보여요.”
“……황제 폐하의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쓰러지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루이제 또한 사뭇 걱정스러운 투로 대꾸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원에서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즐겁게 웃었는데, 지금 아이리스는 이 침상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사람은 정말 약하구나.’
그렇기에 사람은 서로를 도우며 사는 거겠지만, 사실 프레사는 주변의 그 누구도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너무 이상적인 바람이었기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소망이었다.
“아이리스!”
라우렐의 목소리였다.
프레사는 그를 돌아보았다.
루이제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라우렐은 무척 급하게 달려왔는지 평소에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곧 프레사를 발견하더니 묘하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아, 프레사. 아이리스는 괜찮습니까?”
“네, 가벼운 일사병이래요. 며칠 푹 쉬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다행이군요. 이번에도 프레사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라우렐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아이리스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리카온과 닮은 보라색 눈동자가 여러 감정으로 물들었다.
프레사는 그의 옆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를 위로했다.
“지금은 잠든 것뿐이니까 안심하세요, 폐하.”
“……그렇군요. 확실히 편안해 보이네요.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들어서 신경 쓰이기는 했는데…….”
라우렐은 다시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수장답게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몸을 틀어 루이제를 응시했다.
“페놀 경이 아이리스를 데려와 주었다고 들었어. 조만간 상을 내리도록 하지.”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폐하.”
“그대에게는 여러 고마운 일이 많으니까 받아줬으면 해.”
“……감사합니다.”
라우렐이 이번에는 프레사를 향해 돌아섰다.
“리키, 아니 대공에게 들었겠지만, 건국제에서 대공을 당신의 후견인으로 공표할 거예요, 프레사.”
리카온에게 듣기야 했으나 막상 리카온이 후견인이 되는 일이 코앞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되었다.
분명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프레사는 소설 속에 악녀로 환생한 후부터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보니 다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리카온은 이제 공식적으로 프레사의 신분을 책임지는 사람이 될 터였다.
“네, 폐하. 전달받았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프레사. 아니 그레나딘 공작 영애.”
라우렐이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바람에 프레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그레나딘 공작 영애라니,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호칭이었다.
마치 리카온의 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하하, 아직 어색한가 보네요. 곧 적응해야 할 겁니다. 사람들은 이름보다 가문의 이름으로 부르는 걸 더 좋아하니까.”
라우렐은 한없이 가벼운 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제법 묵직했다.
확실히 귀족들은 이름보다 가문을 더 중요시했다.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교육받으며 자랐다.
그렇기에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프레사를 기꺼워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프레사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다가 곧 미소 지었다.
“노력하겠습니다, 폐하.”
라우렐은 그녀를 마주 보다가 다시 아이리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이리스의 손을 꼭 붙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으나 프레사는 라우렐의 행동만으로도 아이리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사랑이구나.’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 그것은 확고한 애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