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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2화 (82/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2화

아이작의 말을 들은 후부터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설마 뻔히 보고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다행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실험을 끝낸 뒤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프레사는 당연히 벌어질 일을 겪은 것처럼 담담했다.

‘하지만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소멸하는 건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그게 좀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충 상황을 확인한 리카온이 프레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길드 마스터가 가져간 덩어리도 사라졌다, 이겁니까?”

“네. 감쪽같이 사라졌대요. 추적 마법사까지 고용했는데 추적할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음.”

리카온은 텅 빈 유리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쭉 뻗더니 상자를 톡톡 노크하듯 두드렸다.

곧 그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이 튀어나와 뚜껑이 열린 상자 속으로 통통 뛰어들었다.

프레사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 낯선 광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추적 마법인가요?”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난 마탑주니까.”

리카온은 종종 이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편이었다.

어쨌든 그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프레사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리카온은 유리 상자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불꽃들을 손바닥으로 거두어들이고 프레사를 응시했다.

“조금 흥미롭네요.”

“덩어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어요?”

“당신이 짐작한 그대로입니다.”

“……세계수의 뿌리로 갔군요.”

“네. 소환된 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돌아갈 곳으로 간 것 같습니다. 흔적이 남기는 했지만, 외부에서 온 개입 같은 건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돌아가야 할 곳.

역시 검은 덩어리는 세계수의 뿌리에서 생겨난 존재가 확실했다.

아니면 세계수에서 태어났거나.

‘어느 쪽이든 썩 좋은 결론은 아니야.’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뿌리로 직접 가거나 그곳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케이드 씨가 가장 근접했지만, 뿌리로 들어가는 건 실패했다고 했어.’

아이작은 아무래도 자신이 인간에 더 가까운 혼혈인 탓인 것 같다고 설명했었다.

지금껏 모두가 세계수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고, 세계수에 문제가 생기리라는 우려는 없었으니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게 조금 답답했다.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수의 존재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이래서 곁에 있을 때 소중히 대하라는 말이 있는 거야.’

꼭 누가 떠오르는 말이었다.

프레사는 팔짱을 낀 채 한참 생각에 잠겼다.

“뿌리에 갈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리카온이 제 팔로 프레사의 팔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프레사는 이어지던 생각을 자연스레 끝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장 눈이 마주쳤다.

프레사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을 알고 있기는 해요.”

“당신과 계약한 정령 이야기겠네요.”

역시 리카온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단번에 이해한 그를 빤히 응시하며 프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리스 님은…… 본인이 세계수를 떠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리카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추측은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세계수의 정령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는 했으니까요.”

“세계수와 정령은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전설 같은 거요? 아마 사실일 거예요. 리스 님이 그러셨거든요.”

프레사는 검은 덩어리의 흔적조자 남지 않은 유리 상자를 다시 응시했다.

프레사는 얼떨결에 칼리스투스와 계약하게 된 후, 그와 관련된 서적을 꽤 많이 찾아보았다.

방금 리카온이 말한 내용은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인데, 세계수와 정령은 서로 이어져 있어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리스가 힘을 잃고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으니 그동안 세계수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미 리스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기도 했기에 새삼스럽지 않았다.

프레사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리스 님이 능력을 모두 되찾기만 한다면 훨씬 수월할 거예요. 지금은 세계수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니까요.”

“어느 정도 걸릴지는 알 수 있습니까?”

“공교롭게도 아뇨.”

“어쨌든 당분간은 기다릴 수밖에 없겠군요.”

리카온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차피 당장 해결할 수도 없고, 세계가 내일 바로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얻은 정보를 잘 기록해 두면 될 터였다.

훗날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비할 수 있도록.

프레사는 산뜻하게 웃으며 리카온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당신 말이 맞아요, 리카온 씨. 대충 검은 덩어리 정체는 확신했으니 이제 다른 일에 신경 쓸 때네요. 갑작스럽겠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요.”

“어떤 부탁입니까?”

“황제 폐하를 만나 뵙고 싶어요.”

리카온은 의아한 눈치였으나 곧 그녀의 말을 전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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