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5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이 알아차릴 묘한 정적이 몇 초간 흘렀다.
프레사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살피며 잠자코 누군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3, 2, 1.
“흠, 흠.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가장 풍채가 좋은 중년 귀족이 두툼한 입술을 달싹였다.
“아, 저도 다른 약속이 있다는 걸 깜빡했군요. 다음에 뵙죠.”
“……저 역시 이만.”
반사적으로 루퍼트 부자를 힐끔거린 귀족 몇 명이 헛기침하며 서둘러 연회장을 떠났다.
프레사는 부채를 펼쳐 양피지에 찍힌 발자국을 확인했다.
이곳에 모여 있던 발자국 중 몇 개가 건물 밖으로 움직이더니 곧 끊어졌다.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면서 추적이 끊어진 것이다.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이리스가 따로 알려 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고…….’
어차피 저 귀족들은 명예와 부, 젊음까지 손에 넣고 싶은 욕심쟁이였으나 어쨌든 피해자였다.
자리를 피한 이유 역시 본인들끼리만 아는 비밀이 어디서 새어 나갔는지 몰라 당황해서였을 것이다.
프레사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루퍼트 부자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의외로 평온하네.’
역시 사기꾼 부자라 이건가.
표정 관리 연습을 꽤 한 모양이었다.
“그런 헛소문을 믿다니, 필츠의 귀족 출신답게 순진하시군요.”
심지어 벤 루퍼트는 대놓고 아이리스와 프레사를 멋모르는 철부지 아가씨 취급이었다.
아이리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사교계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사소한 사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걸요, 루퍼트 남작 영식. 후작 가문에서는 그렇게 교육한답니다. 남작 가문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이리스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사람이 진짜 귀족이구나.
프레사는 속으로 감탄했다.
벤 루퍼트의 알량한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되받아치는 기세가 꽤 매서웠다.
벤 역시 아이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는지 목덜미를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되받아치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는 듯했다.
뒤에서 잠자코 이 상황을 관전하던 엘리엇 루퍼트가 그제야 입술을 열었다.
“당신은 그레나딘 대공녀이기 전에 황실 소속의 약제사입니다. 그런 하찮은 소문에 휘둘리면 황실의 지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쭈.
약제실에서는 매번 꼬박꼬박 반말에 낮잡아 보면서 귀족들 앞이라고 예의를 갖추는 꼴이 우스웠다.
하긴 프레사는 지금 아이리스를 옆구리에 낀 그레나딘 대공녀였다.
게다가 보는 눈까지 많으니 왕처럼 군림할 수 없을 터였다.
“죄송합니다, 수석 약제사님.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흠, 흠.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엘리엇 루퍼트는 프레사를 흘겨보곤 아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굳이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우아하게 웃으며 꼿꼿하게 서 있던 아이리스가 프레사에게 속삭였다.
“프레사, 이제 목적은 달성한 건가요?”
“네. 드디어 이 재미없고 지겨운 곳에서 탈출할 수 있겠어요.”
프레사는 꽉 껴서 불편한 드레스를 얼른 벗어 던지고 침대에 드러눕고 싶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프레사가 눈치 없는 척 귀족들 앞에서 굳이 약 이야기를 꺼낸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제 내부를 의심하기 시작하겠지. 그럼 불안해질 테고 증거를 없애려고 할 거야. 누군가 비밀을 흘려보냈기 때문에 더는 거래할 수 없다는 뻔한 이유로.’
그때가 바로 기회였다.
보통 사기꾼들은 발을 빼기 직전에 크게 한탕 하려는 기이한 습성이 있었다.
프레사의 예상대로라면 루퍼트 부자 또한 그런 행동을 보일 것이다.
‘즉, 최후의 한정 판매 같은 걸 하겠지.’
이 약이 마지막 물량이라고 하면서 몇 배로 가격을 올려서 받을 게 분명했다.
귀족들은 가격이 몇 배가 되든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더는 약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힘들 터였다.
‘분명 계속 복용해야만 효과가 유지된다고 설명했을 테니까.’
그럼 이후에 문제가 생겨도 발뺌할 변명거리로 적당했다.
효과가 없는 이유는 약을 끊어서라고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루퍼트 부자 또한 뼛속까지 귀족이었으니 귀족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이용한 사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불만은 어디서든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가장 값비싼 가격을 제시하고 마지막 약을 손에 넣는 귀족이 있겠지. 그럼 그 반대도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내부 균열, 프레사는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도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갔다고 여기며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할 텐데, 환상의 약을 더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질투심에 눈이 먼 누군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밑밥은 다 깔았으니 며칠만 기다리면 되겠어.’
애초에 이 넓은 저택을 전부 뒤져서 가짜 약을 찾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사기에 당한 귀족들을 압박해서 증인을 확보하는 수밖에.
프레사는 아이리스를 향해 방긋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