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6화
리카온과 마주 앉은 프레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이 제국 어딘가에 제 친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는 거죠?”
“내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확실히.”
리카온은 담담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사실 큰 기대는 없던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만나 봐야 할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 좋을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다지 중요한 질문도 아니었다.
차라리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게 각자에게 더 나은 결말이 아닐까.
원작에도 나오지 않았던 친부모.
아마 프레사가 이 세계에서 환생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몰랐을 이들의 존재가 새삼 낯설었다.
프레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서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리카온 씨.”
“당연합니다. 당신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사람들이니까.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리카온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리카온의 말은 사실이었다.
프레사의 전생에도, 현생에도 친부모라는 존재는 없었다. 그러니 굳이 이제 와 만난다 한들 무언가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그들을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꼭 만나야만 하는 운명처럼.’
운명이라니. 프레사는 완결 직전까지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았다.
찝찝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운명을 거슬러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이유를 모르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할 듯한 기분이.
프레사는 리카온의 말을 듣고도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만날 수 있을까요? 한 번쯤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그런데 가는 길이 조금 멉니다.”
리카온이 손을 허공에 올렸다 내렸다.
곧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지도 한 장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리카온은 단정한 손톱 끝으로 지도의 구석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쪽이더군요.”
프레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리카온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여긴…… 뿌리의 바로 근처 마을이네요.”
“거리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근접하죠.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어떤 말이요?”
프레사가 의아한 눈으로 리카온을 쳐다보자 리카온이 곧장 대답했다.
“당신이 요정어를 읽을 줄 아는 것과 식물을 성장시키는 능력 말입니다.”
“아, 맞아요. 전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에요. 그럼 그게 부모님과 관련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뿌리 근처에 사는 인간은 드물거든요. 여러모로 불편한 곳이라서.”
프레사는 점점 더 자신의 출신이 궁금해졌다.
당시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 전부였지만, 친부모에 대해 알고 나니 그 시작이 어디인지가 알고 싶었다.
솔직히 처음 식물을 성장시키는 능력을 깨닫고 나서는 원작 완결 이후의 삶에 대해서만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과거가 존재했다니.’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프레사는 고민할수록 복잡해지는 생각은 그만 접기로 했다.
지금 여기에서 이러니저러니 추측만 해 봤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프레사는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며 리카온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리카온 씨, 언제쯤 괜찮으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리카온이 고민조차 하지 않고 즉답했다.
프레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매번 그렇게 제가 원한다면 다 해 주실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리카온이 픽 웃었다.
“다 해 줄 수 있으니까. 너무 쉬워 보여서 별로입니까?”
프레사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올 때는 공주님처럼 안겨서 오더니, 이제는 대놓고 난리구나.」
내내 심각한 얼굴로 지도만 내려다보고 있던 리스가 혀를 끌끌 차며 프레사와 리카온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리카온이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프레사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정령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원래 속이 좁은 분이라서요.”
「내가 무슨 속이 좁다고 그러느냐!」
리스가 황당한 투로 반박했으나 프레사는 못 들은 척 리카온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단 제가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서요. 그거만 해결되면 가요.”
“네. 그렇게 하죠. 아, 그리고 이건 선물.”
리카온이 겉옷 안주머니에서 처음 보는 약병을 꺼내 들었다.
프레사가 의아한 눈으로 약병과 리카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약인가요?”
“당신이 해결해야 할 일.”
리카온은 씩 웃더니 프레사의 손을 살짝 쥐더니 그 위에 약병을 올려놓았다.
설마.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프레사는 느릿느릿 눈만 깜빡이다가 약병을 꾹 눌러 쥐었다.
“……다 알고 계셨어요?”
“언제까지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빨리 털어 버리고 더 중요한 걸 해야죠. 당신은.”
리카온이 태연히 내뱉는 말에 프레사는 결국 작게 웃어 버렸다.
리카온이 준 약을 어떻게 써야 할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어서였다.
“고마워요, 리카온 씨. 이 시시한 일은 얼른 정리하고 올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프레사는 리카온의 다정한 인사를 들으며 약병에 담긴 가짜 약을 가볍게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