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7화
“그건……!”
엘리엇이 눈치 빠르게 수정구의 정체를 알아본 듯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프레사는 여유롭게 그를 바라보며 굳이 설명했다.
“바로 알아보시네요. 이 수정구에 진실이 녹음되어 있답니다. 진짜인지 아닌지 궁금하시면 한번 작동시켜 볼까요?”
“수, 수정구라고?”
벤 루퍼트가 불안한 눈치로 수정구와 엘리엇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나오려나.’
프레사는 루퍼트 부자가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몰라서, 몇 가지를 추려 대비해 둔 상태였다.
즉, 루퍼트 부자는 지금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혹시 몰라서 붙여 놓고 오길 잘했지.’
프레사는 카를라를 슬쩍 쳐다보았다.
카를라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 중이었는지 곧장 눈빛을 교환했다.
얼마 전 카를라와 함께 벤 루퍼트를 추적했던 날, 프레사는 힘들게 찾은 그 문에 이 수정구를 붙여 놓고 돌아왔다.
‘그냥 돌아서기 아쉬워서 붙인 건데 말이야.’
언제 또 이런 탐정 체험을 해 보겠는가 싶어서 수정구를 문틈에 끼워 뒀을 뿐인데, 의외의 증거를 수확했다.
‘설마 수정구가 내부까지 흘러 들어갔을 줄은 몰랐지.’
바로 이럴 때 ‘하늘이 돕는다’는 표현을 쓰는 모양이었다.
문에 붙여 뒀던 수정구가 누군가의 몸에 붙어 내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기 행각을 벌이던 엘리엇 루퍼트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녹음되었다.
물론 수정구가 아니어도 다른 증거가 있었지만, 제일 확실하고 편리했기에 프레사는 이것을 가장 먼저 꺼내 들었다.
프레사가 지나간 기억을 되새기는 그때였다.
“어디서 허튼수작을 부리는 거냐!”
엘리엇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벤이 움직였다.
쨍그랑!
프레사의 손에 있던 수정구를 빼앗은 벤은 말릴 새도 없이 그것을 발로 짓이겨 깨트렸다.
반짝이던 수정구는 순식간에 파편이 되어 버렸다.
“이게 무슨 빌어먹을 짓인가요!”
카를라가 언성을 높였으나, 다른 약제사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루퍼트 부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프레사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제 어쩔 거냐고 비아냥거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금세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프레사가 웃고 있어서였다.
그녀는 은은하게 미소 지은 채 손뼉을 한번 쳤다.
짝!
경쾌한 소리가 약제부실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어요.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뭐, 뭐라고?”
엘리엇이 인상을 찡그리는 그 순간.
“루퍼트 백작, 그리고 루퍼트 백작 영식. 사기죄로 체포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제복을 차려입은 루이제가 등장했다.
잘 꾸며진 연극처럼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사, 사기죄라니 말도 안 됩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고작 저 낙하산의 말을 믿고 수석 약제사인 나를 체포하겠다고? 페놀 백작 가문은 뒷일이 두렵지도 않은가?”
벤과 엘리엇이 연달아 항의했으나 루이제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뒤를 힐끔거렸다.
우뚝 서 있던 다른 기사들이 루퍼트 부자의 팔을 붙잡아 강제로 끌고 나갔다.
동시에 프레사가 바닥을 향해 몸을 숙이더니, 수정구 파편 틈에서 아주 작은 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탁탁 털어내자 곧장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엇 루퍼트의 목소리였다.
-젊음의 비약 이야기는 함구하라고 부탁했을 텐데, 그새 밖으로 새어 나간 걸 보면 더는 여러분을 신뢰할 수 없겠군요. 루퍼트 가문은 고심 끝에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나, 나는 아니란 말이오!
-우리 중에 비밀 누설자가 없을지도 모르잖소!
-이건 너무 섣부른…….
사기 피해자들이 항변했으나 녹음된 엘리엇 루퍼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애석하게도 약속이 깨졌으니, 비약 판매는 일시적으로 중단하겠습니다. 범인을 찾을 때까지는 말입니다. 섣불리 여러분을 믿고 판매한 제 잘못도 있겠죠. 그리고 한동안은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만, 소문이 잠잠해지면 다시 판매할 테니 그때까지 다들 입 단속해요. 계속 약을 얻고 싶다면. 아, 그리고 이건 마지막 물량이니만큼 평소 가격의 2배는 받아야겠습니다. 벤, 젊음의 비약을 가져오거라.
벤 루퍼트가 사색이 되어 프레사를 쳐다보았다.
“분명 깨트렸는데 어떻게…….”
프레사는 빙긋 웃으며 벤의 말을 끊었다.
“특수 제작했거든요. 이중 구조라고 들어 봤어요?”
즉 벤 루퍼트가 밟아서 부순 수정구는 겉포장이었고 진짜는 그 안에 있었다.
조개 속의 진주처럼 말이다.
“증거는 그 무엇보다 확실하니 이제 심문소로 가시죠. 끌고 가.”
잠자코 서 있던 루이제가 차분한 투로 명령했고 기사들이 다시 움직였다.
“이, 이거 놓으십시오!”
벤이 반항했으나 그보다 덩치가 2배나 큰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엘리엇 루퍼트는 끌려 나가면서도 프레사를 노려보며 비난의 말을 계속했다.
“저 낙하산 계집의 말을 믿다니 황제 폐하께서 큰 실수하시는 거라고! 이건 다 모함이야! 이대로 끝인 줄 알아? 너 같은 왕국 출신 계집 따위를 이 제국에 들인 것부터…….”
쾅.
약제부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사방이 조용했다.
복도를 걸어 나가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진 후에야 침묵에 휩싸여 있던 약제부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우, 우리는 몰랐습니다!”
“……맞아요! 수석 약제사가 저런 짓을 벌이다니…….”
“이건 약제부의 수치로군요!”
지금껏 모르는 척하고 있던 약제사들이 서로의 결백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네, 네. 다들 몰랐겠죠. 하지만 당분간 정직 명령이 떨어졌네요. 안타까워라. 푹 쉬세요. 휴가라고 생각하시고.”
프레사는 그들을 향해 화사하게 웃어 주며 단단히 못 박았다.
그들은 이제 해고나 다름없다고.
그러자 약제사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무, 무슨 소리예요? 우리는 몰랐다니까요!”
어디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만 돌아가요, 카를라.”
그들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은 프레사는 카를라의 손을 잡은 채 약제부실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할 일은 이제 모두 끝났다.
“이봐요! 가지 말고 무슨 뜻인지 설명을 좀…….”
“카를라! 카를라, 잠시만요!”
약제사 몇 명이 프레사의 뒤를 따라오기 위해 한 걸음 떼는데, 루이제가 그들을 막아섰다.
“여러분은 조사에 응해 주셔야겠습니다.”
“우리가 왜 조사를…….”
“억울합니다!”
프레사와 카를라는 그들을 돌아보며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쨌든 사건 해결이네요.”
프레사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카를라가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프레사. 정말로요.”
카를라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사기꾼과 한통속이 되었다는 죄책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안.
프레사는 그 모든 감정을 이미 겪은 적이 있기에 카를라를 이해했다.
잠시 카를라를 빤히 마주 보던 프레사가 곧 카를라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고마워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네!”
카를라가 눈물 고인 눈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프레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