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8화 (88/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88화

프레사는 다급히 문을 열었다.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클로의 표정이 어두웠다.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듯한 얼굴이었다.

프레사는 그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클로 씨? 무슨 일인가요?”

클로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입술만 여러 번 떼어냈다가 닫았다.

프레사는 그를 달래듯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말해 보세요.”

“……치치, 치치가 이상해. 도와줘!”

치치라면 클로와 함께 있던 늑대였다.

지난번에는 상처만 있었을 뿐 금방 회복되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리스가 자연스럽게 프레사의 정수리에 자리 잡고 앉으며 말했다.

「늑대인간은 오랜만이라서 신기하구나. 어쨌든 서둘러라, 레사야.」

프레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서둘러 약과 약초를 챙겨 클로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다녀오거라.」

리스는 아직 화분 없이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못해서 프레사를 배웅했다.

프레사는 조그맣게 다녀오겠다고 대답한 후 클로를 향해 물었다.

“증상이 어떤데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이상해.”

“그냥 이상하다고요?”

“응.”

클로의 대답은 확고했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다는 걸까.

역시 직접 보지 않고서는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마탑의 순간이동 장치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의 방에 도착했다.

치치는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클로가 간절한 눈으로 프레사를 쳐다보았다.

“괜찮은 거지? 응?”

“일단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신중하게 대꾸한 프레사는 약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치치? 괜찮아?”

“끼잉…….”

치치가 가냘프게 울더니 숨을 쉬기 힘든 것처럼 혀를 내민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불편한 게 맞는 듯한데…….

프레사는 꼼꼼하게 치치의 상태를 살피다가 곧 원인을 알아냈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클로를 불렀다.

“……클로 씨.”

“으, 응!”

초조하게 서 있던 클로가 대답했다.

프레사는 그를 돌아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치치는 좀 더운 것뿐이에요.”

“더운 거라고?”

클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치치의 고향은 아무래도 추운 곳이었나 봐요. 아무리 곧 가을이라지만, 아직 낮에는 덥거든요. 보세요, 여기. 털이 너무 많이 자랐어요. 여름 내내 많이 힘들었겠어요.”

프레사는 클로의 손을 덥석 붙잡아 풍성한 치치의 털을 만지도록 했다.

클로가 움찔하더니 자연스럽게 치치를 쓰다듬었다.

치치는 여전히 더운 듯 헥헥 숨을 내쉬었으나 클로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고개만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한참 치치를 쓰다듬던 클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프레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방을 최대한 시원하게 해 주세요. 마탑에 그런 마도구는 없나요?”

“그게 난…… 추워서…….”

클로가 프레사의 눈을 피하며 더듬거렸다.

“……춥다고요? 이렇게 따뜻한 날씨인데요?”

“내 고향은 늘 여름이었어.”

늘 여름인 곳이라면 아마 남쪽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프레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쪽에서 태어났나 보네요. 그럼 확실히 더위에 강하겠어요. 둘이 지금껏 어떻게 지낸 거예요?”

“치치와 지낸 지 얼마 안 돼서…… 여름은 처음이야.”

프레사는 클로의 대답을 듣고 조금 놀랐다.

이렇게 큰 늑대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것도 그렇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이토록 단단한 유대감을 쌓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늑대인간이라서 통하는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프레사는 클로와 치치를 흐뭇하게 번갈아 보고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나 섰다.

“혹시 모르니까 진통제랑 챙겨온 약은 줄게요. 일단 시원한 물을 주시고요. 체온을 내릴 수 있는 마도구 같은 걸 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약을 만들어 볼게요.”

“……응, 고마워. 프레사.”

클로는 여전히 몸을 한껏 쭈그리고 앉아서 고개만 들어 프레사를 올려다보았다.

“큰 병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물론 더위를 먹는 것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당장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프레사는 클로와 눈을 맞춘 채 미소 지었다.

“그럼 약을 완성하면 다시 찾아올게요. 그동안 체온 관리 잘해 주세요. 곧 겨울이 올 테니 털을 밀라는 조언은 못 하겠네요.”

프레사가 챙겨 온 약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하는데 클로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프레사.”

“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어떤 건데요?”

프레사는 클로가 또 치치에 대해 질문할 줄 알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클로는 말하기 힘든 이야기인 듯 꽤 오랜 시간 머뭇거렸다.

프레사는 굳이 재촉하지 않고 그가 편히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클로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나, 다시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아.”

프레사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클로를 응시했다.

클로는 태어날 때부터 늑대인간이었던 게 아니었나?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원래는 사람이었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어쩌다 늑대인간이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어요? 개인적인 이야기니까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걸 알면 방법을 찾을지도 몰라서요.”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마탑주는 내가…… 저주를 받았을 거라고 그랬어. 확실하지는 않대.”

클로는 선뜻 대답해 주었지만, 사실 그다지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리카온까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원인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만약 정말 저주 때문이라면 약사인 프레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예 방법조차 찾아보지 않는다는 건 프레사답지 않았다.

‘늑대인간이라면 다른 늑대인간에게 물린다는 설정이 있기야 하지만, 이 세계에서도 통하는 얘기인지는 모르니까 자료를 찾아야 해.’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클로를 향해 말했다.

“그럼 저주 관련으로 좀 더 알아볼게요. 저주를 해제하는 약도 예전에는 존재했다고 하니까요.”

“정말이야?”

“물론이죠. 대신 공짜는 아니고요.”

“나 돈은 별로 없는데…….”

클로가 덩치에 맞지 않게 우물쭈물하며 중얼거렸다.

마탑에서 월급을 많이 안 주는 걸까?

프레사는 심각한 얼굴로 클로를 쳐다보았다.

리카온이 그런 걸로 쪼잔하게 굴지는 않을 테니 클로가 의외로 돈을 여기저기 쓰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애초에 프레사는 돈을 받을 생각이 아니었으므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돈으로 받겠다는 말은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필요할 때 도움 요청권 같은 걸 쓰고 싶었거든요.”

“도움 요청권?”

“그냥 쿠폰 같은 거예요. 언젠가 클로 씨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제가 클로 씨를 먼저 돕는 데 성공했을 때 얘기지만요.”

“알았어! 약속할게, 약속.”

클로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언제 봐도 이 단순함은 영 적응하기 힘들었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

클로가 약속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프레사는 지난번에 클로와 한 약속이 떠올랐다.

약제부 일로 한동안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바로 그 약속이었다.

클로가 프레사에게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들킨 일이었다.

“그나저나 약속 잘 지키셨네요, 클로 씨.”

“응. 약속했으니까.”

이렇다 할 설명 없이도 단번에 프레사의 말을 알아들은 클로가 씩 웃었다.

분명 순수하게 웃는 얼굴이었는데 커다란 체구 탓인지 다소 위협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프레사는 아무렇지 않게 마주 미소 지었다.

“잘했어요. 앞으로도 조심하셔야 해요.”

리카온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클로가 혼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둘 다였다.

클로는 해맑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치치 시원하게 해 주는 거 잊지 마시고요. 치치도 안녕.”

프레사는 클로와 치치에게 인사를 남긴 후 다시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자 피로가 몰려왔다.

얼른 박하수 한 병 마시고 낮잠이나 자야겠다, 생각하는데 문 앞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리카온 씨! 무슨 일이에요?”

리카온이 새하얀 정장 차림으로 프레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사는 클로와 만나지 말라고 했던 리카온의 말을 떠올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리카온 역시 프레사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하고. 그런데 어딜 다녀오는 길입니까?”

프레사는 아주 짧게 고민하다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잠시 산책을 다녀왔어요. 오늘 날씨가 좋더라고요.”

“……정말입니까?”

“네, 그럼요.”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리카온과 클로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

프레사가 클로와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어도 그를 돕고 싶었다.

외톨이처럼 혼자인 그가 신경 쓰였다.

아마 과거 프레사의 기억 탓일지도 몰랐다.

이 세상에 도움을 청할 데라고는 아무 곳도 없어서,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쓸쓸하고 아픈 기억.

프레사가 생각에 잠긴 그때였다.

“그런 것치고는 낯선 냄새가 나는데.”

리카온이 프레사의 얼굴 바로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