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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4화 (94/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4화

프레사는 서둘러 그 옆으로 다가가 로렌의 손을 꼭 붙잡았다.

“로렌, 좀 어때? 신관님이 치료해 주셨어.”

“아, 어쩐지…… 몸이 가벼워졌어요. 꼭 꿈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에요.”

“열도 내렸구나. 다행이다.”

프레사는 로렌의 이마를 짚어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성력이 차도가 있다니 다행이었다.

“로렌, 괜찮아? 이제 정말 문제없는 거지?”

뒤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제롬이 다급히 물었다.

로렌은 그를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

“네, 괜찮아요. 덕분에 살았어요, 제롬.”

“내, 내가 뭘 했다고.”

“프레사 아가씨께 연락해 줬잖아요. 고마워요.”

“……인사는 됐으니까 얼른 낫기나 해.”

제롬이 볼을 붉히더니 뚝딱거리며 중얼거렸다.

뭐야.

둘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프레사가 로렌과 제롬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데, 잠자코 로렌의 프레사의 정수리 위에 앉아 있던 리스가 넌지시 말했다.

「흠. 그런데 아직 반점이 사라지지 않았다.」

프레사는 그제야 로렌의 목을 살펴보았다.

리스의 말처럼 검은 반점은 조금 흐려졌을 뿐,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프레사가 쳐다보는 순간, 피부에 스며들기라도 한 것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프레사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사라진 게 아니라…… 꼭 숨은 것 같잖아.’

어쩌면 로렌은 치료가 완전히 된 게 아닐지도 몰랐다.

로렌은 역시 그 숲에서 저주에 걸린 걸까?

하지만 검은 덩어리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라우렐이나 아이작과는 다른 증상이었던 듯싶다.

‘세계수와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해.’

프레사가 아까 숲에서 봤던 기이한 흙을 떠올리는데 리스가 나직이 말했다.

「숲에서 뭘 보았는지 말해 줬으면 한다.」

프레사는 리스만 알아차릴 만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돌아오면 바로 리스와 상의할 계획이었는데, 리카온이 프레사의 예상보다 일찍 돌아오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세계수로 가려면 뿌리를, 뿌리로 가려면…… 친부모님이 거주한다는 마을을 거쳐야 해.’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 프레사가 모두 거쳐야 할 곳들이었다.

어쩌면 리스와 만난 그때부터 이 모든 일이 예정되어 있던 건 아닐까, 그런 운명론적인 생각이 들었다.

“무슨 증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진정된 듯하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혹, 다시 상태가 달라진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할 일을 끝낸 신관이 피곤한 눈으로 프레사를 쳐다보며 넌지시 말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듯,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힘을 꽤 사용한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서둘러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관님. 살펴 가세요.”

“별말씀을요. 그럼 이만.”

신관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리카온을 쳐다보았다.

“가시죠.”

리카온이 기다렸다는 듯 신관과 함께 침실을 떠났다.

프레사는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다시 로렌을 응시했다.

“로렌, 괜찮다면 마탑에 함께 가지 않을래?”

“……네? 마탑이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로렌이 놀란 표정을 내보였다.

“로렌이…… 마탑에?”

제롬 또한 당황한 눈치였다.

“크게 아팠으니 당분간 옆에서 지켜보고 싶어서 그래. 나처럼 훌륭한 약사와 리카온 씨 같은 마법사가 있다면 너도 안심할 수 있을 거야.”

프레사는 차분하게 로렌을 설득했다.

로렌은 망설이는 눈으로 프레사를 마주 보다가 느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그럼 약방은 어떻게 해요. 이 마을의 유일한 약방이잖아요.”

“스크롤이 있으니 주기적으로 이동해서 약을 가져다 놓으면 마을 사람들은 괜찮을 거야. 임시로 맡아줄 약사를 구해도 되고.”

“마탑은 가기 힘든 곳이라고 들었어요. 아가씨야 능력이 출중하시지만 저는 일개 하녀인걸요.”

“로렌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강한 사람이야. 그리고 리카온 씨가 먼저 제안해 준 거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럼 제롬은…….”

프레사가 로렌의 걱정을 전부 다 되받아치자, 로렌은 제롬을 힐끔 응시했다.

프레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롬은 이곳에 혼자 남겨질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여기서 제롬을 두고 간다고 하면 로렌 마음이 불편하겠지.’

아무리 제롬이 과거에 프레사를 괴롭혔다지만, 프레사 또한 그런 결말은 내키지 않았다.

제롬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프레사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으니까.

소프 가문이 폭삭 망하고 다른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제롬은 굳이 이곳을 찾았다.

분명 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도.

‘처음에는 뻔뻔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름대로 사죄하고 싶었던 거겠지.’

로렌이 제롬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프레사는 알 수 있었다.

제롬이 그동안 로렌과 이곳에서 잘 지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롬도 같이 갈 생각 있어?”

“……나, 나도?”

제롬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레사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난 좋아. 내가 가도 괜찮다면.”

제롬은 프레사의 눈치를 살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프레사는 묘하게 순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로렌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럼 다 해결됐지?”

“……네, 아가씨. 감사해요.”

로렌이 속삭이듯 대답했고 프레사는 그제야 로렌을 가볍게 껴안았다.

“당연한 일에 고마워하지 마. 로렌은 유일한 내 가족이니까.”

그 말을 들은 제롬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으나 프레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마주 안아주는 로렌의 체온을 온전히 느낄 뿐이었다.

로렌이 괜찮아져서 다행이지만, 라우렐과 아이작에게 신성력이 큰 소용없었던 것을 떠올리면 불안했다.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프레사는 로렌을 지킬 것이다.

로렌이 프레사를 지켜줬던 것처럼 프레사 또한 그렇게 하고 싶었다.

로렌은 프레사의 세상이 온통 가시덩굴일 때 유일하게 그 안에 머물러준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

속으로 다짐한 프레사는 두 눈을 꼭 감았다.

* * *

프레사는 며칠 약방에 머무르게 되었다.

로렌이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 떠날 계획이었지만, 약방을 직접 정리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리카온 역시 그녀와 남겠다고 하는 바람에 좁은 약방이 예전처럼 꽉 들어찼다.

프레사는 약방에 살 때 늘 둘렀던 흰색 앞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낮은 사다리 위에 올라선 채 약장을 열었다.

약장에는 그녀가 이곳에 와서 만들었던 약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로렌과 제롬이 잘 관리했는지 쌓인 먼지 없이 깨끗했다.

프레사는 묘한 기분이 들어 잠시 약장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기를 정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리카온, 제드와 함께 지낼 때는 그저 돈을 벌고 약사로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씩 밀려오는 세계수의 재앙을 어떻게든 끝내야 했다.

세계수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당장은 그럴 방도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리스 님이 회복하면 세계수 입구를 열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게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꽤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리스가 느끼는 시간과 프레사가 느끼는 시간은 엄연히 달랐다.

리스는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에 이 순간이 찰나겠지만, 프레사에게는 길고 아쉬운 시간이었다.

프레사가 싱숭생숭한 얼굴로 약장의 약을 살펴보는데 뒤쪽에서 리카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사.”

“아, 리카온 씨.”

프레사는 약을 손에 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하의 화분을 정리하느라 제롬과 리카온이 내려갔었는데 벌써 끝내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리카온은 걱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참 전에 왔는데 인기척을 못 느끼더군요.”

“……잠시 다른 생각 중이었거든요.”

프레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약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병 안에 든 노란색 액체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리카온은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더니 물었다.

“무슨 생각 말입니까?”

“이것도 다 추억이네, 그런 생각? 한참 더운 여름이었잖아요. 리카온 씨와 처음 만난 날은 지금도 신기해요.”

리카온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처음?”

“네, 배에서 만난 날이요. 그때 리카온 씨가 멀미약을 줬잖아요.”

리카온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프레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프레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리카온 씨?’ 하고 부르자 그제야 나직이 대답했다.

“글쎄요.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는데.”

“……네?”

프레사가 어벙하게 되묻는 그때.

쿠당탕!

눈 깜빡할 새에 프레사가 밟고 있던 낡은 사다리가 무너졌고, 프레사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쿵, 소리는 이어지지 않았고 몸 그 어디도 아픈 느낌은 없었다.

그저 익숙한 라일락 향기와 따뜻한 온기만이 오롯했다.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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