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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5화 (95/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5화

쿵, 쿵, 쿵.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프레사의 것인지, 리카온의 것인지 모를 만큼 선명한 소리였다.

“괜찮습니까?”

뒤이어 들려온 리카온의 목소리에 프레사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리카온이 그녀를 마주 내려다보았다.

프레사를 향한 걱정 어린 시선이 곧장 와 닿았다.

리카온이 떨어지는 프레사를 받아서 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물론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만, 이 상황은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지난번에도 이렇게 안아 들어 주더니.’

전신이 단번에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프레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마워요. 이제 괜찮으니 내려주세요.”

“분부대로.”

리카온은 선뜻 프레사를 안전하게 내려 주었다.

잠시 허공에 붕 떠 있던 발이 딱딱한 나무 바닥에 닿자 프레사는 그제야 안도했다.

‘정말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리카온은 늘 본인 얼굴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런 행동을 잘도 했다.

생김새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리카온과 친밀한 프레사에게는 종종 당혹스러웠다.

너무 가까이 지내서 자주 잊고 지냈던 리카온의 예쁨이 매번 새삼스러워서였다.

프레사는 열이 오른 그녀의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 식히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다리의 한쪽 다리가 삐딱하게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다행히 완전히 부서진 것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에 그친 것이다.

프레사는 사다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게 참, 정말 낡은 사다리였나 봐요.”

“여름 습기에 약해졌을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습니까. 당신은 이런 데에서 조심성이 부족하다고.”

리카온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어울리지도 않는 잔소리를 시작했다.

프레사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래도 리카온 씨 덕분에 안 다쳤으니 됐잖아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타인을 챙기는 것만큼 당신을 챙겼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할 뿐입니다.”

리카온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프레사는 애꿎은 사다리만 치다가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리카온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리카온 씨가 곁에 있어서 다치지 않은 거예요. 꼭 제 행운의 상대 같아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그럼 서로를 행운으로 여길까요?”

프레사가 장난스럽게 물었으나 리카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프레사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프레사는 머쓱해져서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재차 물었다.

“영 별로인가요?”

“아뇨.”

리카온이 성큼 한 걸음 다가오는 바람에 프레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는 프레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싸듯 쥐고서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은 내 인생의 행운이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일지는 모르겠으니까.”

프레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리카온이 이어 말했다.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만…….”

“프레사! 지하는 끝난…… 것 같……. 미, 미안.”

하필이면 제롬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리카온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프레사는 리카온을 바라보고 있다가 뒤로 물러나며 제롬을 바라보았다.

“벌써 끝났어? 또 이상한 실수한 건 아니지? 내가 확인해 볼게. 리카온 씨, 제롬과 약장 정리를 부탁해도 될까요? 제가 거의 다 정리했으니 남은 약품의 유효기간만 확인해 주면 되거든요.”

“……알겠습니다.”

리카온이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프레사는 잠깐 그를 쳐다본 후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다.

‘다음 말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타박타박 프레사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예기치 못하게 리카온과 둘만 남게 된 제롬이 땀을 뻘뻘 흘리며 리카온의 눈치를 살폈다.

“저…… 죄, 죄송…….”

“됐습니다.”

서늘한 말투로나마 그렇게 말했으나, 리카온의 가늘어진 눈매는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롬의 얼굴이 단번에 울상으로 물들었다.

이후로는 클로가 텃밭을 뛰어다니며 짖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 * *

약방 정리가 얼추 끝난 후 로렌이 침대에서 벗어나 걸을 수 있게 되어서야 그들은 마탑으로 돌아왔다.

분명 약방이 프레사의 집이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리웠던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새 마탑 생활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리카온은 프레사에게 미리 말해 줬던 대로 로렌과 제롬을 위해 각각 방을 내어줬다.

프레사는 그 두 사람이 처음 움직이는 계단을 밟고 나서 보인 반응이 다시 떠올라 작게 웃었다.

리카온은 프레사가 며칠 더 쉬기를 바랐지만, 프레사는 마탑에 오자마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클로였다.

클로는 창가에 앞발을 올린 채 날아가는 새를 위협하고 있었다.

“왕! 으르르릉 왈!”

클로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영락없이 집 지키는 강아지였다.

‘클로 씨를 계속 저렇게 둘 수는 없어.’

프레사는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다시 책을 펼쳤다.

파로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해결 방법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답을 얻지 못했다.

다행히 클로는 강아지의 삶이 꽤 만족스러운 듯 보였으나 어디까지나 프레사의 추측일 뿐이었다.

‘늑대인간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으니 분명 힘들 거야.’

프레사는 빼곡한 글자를 내려다보다 말고 클로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어떻게 느꼈는지 몰라도, 클로가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왕! 왕!”

프레사의 관심을 받아서 꽤 즐거운 듯 아예 등을 대고 드러누워 배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프레사는 자연스럽게 클로의 배와 턱을 긁어 주다 말고 멈칫했다.

‘설마 인간으로서 자아를 점점 잃어가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이런 불안한 생각이 들다니.

“클로 씨,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으면 한 번 짖어 주세요.”

“왕!”

“……다행이다.”

프레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 지쳐서 세계수 화분에 누워 잠들어 있던 리스가 깨어났다.

그런데도 묘하게 피곤한 솜뭉치처럼 보여서 프레사는 날아온 그를 두 손바닥에 조심스레 앉혔다.

리스가 작게 하품을 내뱉었다.

“많이 피곤하세요?”

「나도 이제 많이 늙었으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리스는 존재하는지도 모를 허리를 작은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프레사는 그 앙증맞은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좀 더 주무셔도 되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나저나 잠시도 쉬지 않는구나. 이 개의 꼬리와 레사 너까지 둘 다 말이다.」

리스가 질린다는 듯한 눈으로 클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클로는 여전히 배를 까고서 꼬리를 방방 흔들고 있었다.

「저렇게나 개의 삶에 만족스러워하니 서두를 필요도 없겠구나.」

“……사실 클로 씨가 인간의 자아를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하던 중이었어요.”

프레사는 클로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왕!”

하지만 클로는 강아지가 된 후로 유독 청각이 발달해서 금세 알아듣고 대답했다.

아마 그렇지 않다는 뜻인 듯했다.

리스가 혀를 쯧쯧 차며 프레사의 정수리 위로 날아와 앉았다.

「그나저나 할 말이 있다.」

“어떤 말이요?”

프레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살짝 기울였다가 바로 했다.

하마터면 또 리스를 미끄러트릴 뻔한 셈이었다.

리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프레사가 의아하게 여길 무렵 대답했다.

「내가 한번 능력을 사용해 봐도 될 것 같으냐? 약방에 다녀온 후 몸이 좀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이다.」

“……능력이요? 지금 말씀이세요?”

「그래.」

“어디에 쓰시려고요?”

「저 개한테 말이다.」

리스가 담담히 내뱉는 말에 프레사만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리스의 능력이 완전히 돌아올지 장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리스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프레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 정도로 힘이 돌아오신 건가요?”

「사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실험해 봐서 나쁠 건 없지.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

썩 그렇게 자신이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프레사는 리스를 믿었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리스의 말처럼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세계수의 정령인 리스는 누군가를 해칠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프레사가 만든 약처럼 부작용도 없을 것이다.

클로가 그새 얌전히 앉아서 프레사를 올려다보았다.

프레사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프레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허공을 날아가 클로의 눈앞에서 멈췄다.

리스는 가느다란 두 팔을 뻗더니 클로의 코를 가볍게 잡았다.

「아프지는 않으니 얌전히 있거라.」

“왕!”

클로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잠시 흐릿한 빛이 둘 사이를 맴도는가 싶더니 점점 커졌다.

결국 프레사는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리고 곧 빛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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