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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7화 (97/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7화

이게 무슨 소리람.

프레사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온갖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봤지만, 레인은 그중에서도 상위권이었다.

초면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 저 독특한 말투며 행동까지 전부 다 수상했다.

‘사실 클로 씨도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마탑의 마법사가 되는 기준은 ‘이상함’인 걸까?

프레사가 리카온의 안목을 의심하느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레인이 재차 말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거절할게요.”

“저는 불의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 예?”

레인은 프레사가 당연히 자신을 받아줄 줄 알았는지, 자기 자랑을 늘어놓다 말고 어벙해졌다.

프레사는 미소 지은 채 다시 한번 또박또박 답했다.

“저는 제자를 들일 생각이 없답니다. 그리고 레인 씨와 저는 오늘 처음 보는걸요.”

“……저는 운명을 느꼈는데요?”

“무슨 운명 말인가요?”

“당신은 제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는 운명!”

레인의 짙푸른 눈동자가 불꽃이라도 튀는 것처럼 번쩍였다.

프레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구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만큼 재밌기도 했다.

프레사 인생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신선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레사는 레인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제자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지금 해야 할 일도 산더미인데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자라면 마음껏 부려 먹어도 된다는 뜻 아닌가?

사실 그건 제자보다는 조수에 가깝기는 했지만, 프레사에게는 그게 그거였다.

자진해서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프레사는 한 걸음 물러나려다가 도로 레인에게 한 발짝 다가가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레인 씨, 정말 제 제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설마 제가 스승님께 거짓말이라도 하겠습니까?”

이봐요, 호칭이 벌써 스승님이잖아요.

프레사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꾹 참고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운명이니 그런 얘기 말고, 정말 제 제자가 되고 싶은 이유가 뭔가요?”

레인의 표정이 살짝 흐릿해졌다.

“……그건 운명의 흐름이…….”

“제가 보기에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렇죠?”

“…….”

“솔직하게 말해 주신다면 레인 씨의 부탁을 들어드릴게요.”

아무리 혹하는 제안이라고 해도 이유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영 찝찝했다.

일손이 느는 것도 좋았지만, 프레사는 레인이 다짜고짜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레인은 고민하듯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침묵했다.

지금 그와 만난 후로 가장 조용한 순간이었다.

프레사는 굳이 재촉하지 않고 그가 대답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 정적이 조금 더 길어지자 곤란한 질문이었나 싶어서 입을 열었다.

“혹 말씀하시기 어려우시면…….”

“만들고 싶은 약이 있습니다. 마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약이요. 저에게 제대로 된 지식을 알려 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수천 번을 만들어도 실패했거든요.”

레인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프레사의 말을 끊었다.

프레사는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법으로는 만들지 못하는 약이 무슨 약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스승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는 데에서 조금 놀랐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고, 끈질기게 부탁할 때는 왜 이러는지 이유가 알고 싶었을 뿐인데.

‘하지만 이것도 진심은 아닌 것 같아.’

프레사는 아까와 다르게 진중한 레인의 눈을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분명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게 무엇이든 프레사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존재들이 늘 함께였으므로.

무엇보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레인은 계속 프레사를 따라다닐 것이 분명해 보였다.

차라리 옆에 두고 의중을 알아내는 편이 훨씬 편했다.

지금 무슨 약을 만들고 싶은 건지 물어본다고 해도 분명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요. 그렇게 원하신다면 받아들이겠어요.”

“정말입니까? 역시 안목이 좋으시군요! 저처럼 엄청난 불의 마법사를 제자로 두시겠다니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레인은 언제 진지했느냐는 듯 금세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프레사는 고개를 살짝 까딱인 후 손뼉을 한번 쳐서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할까요? 저는 실험해야 할 게 좀 있거든요. 레인 씨는 바닥만 청소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을 맡아 주셔야 해요.”

사실 청소는 메리가 맡았었지만, 메리는 워낙 실수가 잦고 깨트리는 물건이 많아서 프레사가 하고 있었다.

훌쩍거리며 약제실을 떠나던 메리의 뒷모습이 잠깐 떠올랐다.

영영 안 보는 건 아니고 지금도 프레사의 방 청소며 식사 같은 수발을 들기는 했다.

물론 그때마다 프레사를 아련하게 쳐다보곤 하지만.

‘이상한 사람 목록에 메리도 추가해야겠네.’

프레사가 잠시 잡념에 사로잡힌 사이, 레인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작은 불꽃을 피워냈다.

“불로 먼지를 태우는 건 어떨까요?”

너무 자연스럽게 묻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렇게 하라고 말할 뻔했다.

프레사는 벽에 세워 두었던 대걸레를 그에게 내밀었다.

“얌전히 물걸레로 닦아 주세요.”

“예, 뭐. 스승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프레사에게 자칭 ‘천재 불의 마법사 제자’가 생긴 순간이었다.

불의 마법사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천재인지는 좀 더 알아봐야겠다.

어쨌든 레인이 마법사인 점에서 분명 유용할 것이다.

‘사람을 너무 능력 위주로 보는 것 같지만, 조만간 세계수로 가게 될지도 모르니 대비해 둘 필요가 있어.’

마법이라면 역시 리카온이 제격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마법을 자제해야 했다.

아마 몇 년 동안은 조심해야 할 테니 되도록 마법 사용을 못 하도록 하고 싶었다.

리카온이 프레사를 워낙 꽁꽁 싸매고 도는 판에 마탑까지 와서 다른 마법사와의 친분은 쌓을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사교였는데 말이다.

물론 레인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차차 알아가야겠지만.

‘좀 더 가까워지면 속내를 보일지도 몰라.’

생각을 정리한 프레사는 레인이 정신 사납게 걸레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 메리처럼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감시 차원이었다.

다행히 레인은 소란스러운 언행과 달리 꼼꼼하게 바닥을 잘 닦아 나갔다.

당분간 약제실 청소 정도는 맡겨도 충분할 듯했다.

‘그나저나 리카온 씨한테는 어떻게 설명하지?’

일단 나쁠 건 없을 듯해서 내린 결정이지만, 리카온은 신경 쓸 게 분명했다.

마탑에 온 후로 어째 특이한 사람들만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약제사로서 첫 제자가 생겼으니 좋게 생각하자.’

프레사는 레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말고 검은 흙 실험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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