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8화
프레사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응접실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즐겁고 따뜻한 주제만 오가던 응접실이 살얼음판이 되었다.
프레사 역시 이 좋은 분위기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지만, 급한 일인 만큼 어쩔 수 없었다.
라우렐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고 아이리스는 걱정스러운 낯이었다.
담담한 사람은 이미 이 상황을 예견했던 프레사와 리카온 둘뿐이었다.
프레사는 파로 마을 숲에서 채취한 검은 흙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병에 담긴 흙은 여전히 새카맣고 기이해 보였다.
“지난번 폐하의 몸에서 빠져나온 그 검은 덩어리와 흡사한 흙이에요. 성분을 실험해 봤는데 거의 똑같더라고요. 물론 그 덩어리는 유기체에 가까웠지만, 이건 정말 흙과 비슷했어요.”
“이 흙이 파로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 들었는데.”
라우렐은 역시 리카온에게 어느 정도 설명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불쾌한 시선으로 유리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레사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직 확실한 인과관계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이 흙은 처음 보는 병을 유발하는 듯했습니다.”
“병이라면…… 전염력도 있는 건가요?”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리스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프레사는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 또한 확실하게 밝히지 못했어요, 아이리스.”
“프레사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이 흙 때문이었던 거죠?”
“네. 오염된 숲에 다녀왔고 기이한 증상을 보였어요.”
“어떤 증상이었나요?”
“전신에 검은색 반점이 생겼는데 신성력이 닿자 도망이라도 치듯 숨더라고요. 하지만 신성력으로도 치료 자체는 불가능했습니다.”
프레사는 로렌이 겪은 병을 상세히 설명했다.
라우렐과 아이리스의 표정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딱딱하게 굳었다.
프레사에게 모든 발언권을 맡겼던 리카온이 넌지시 덧붙였다.
“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이 검은 흙과 관련된 정보가 없습니다. 비교적 외부와 단절된 섬인 파로 마을의 숲에서 이 흙이 발견됐으니 차차 퍼질지도 모른다고 예상 중입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군. 불과 몇 해 전에 드래곤을 처단했는데 이제는 원인조차 확실하지 않은 질병이라니. 귀족들이 알면 현 황제의 무능함 탓이라며 떠들어 대겠지.”
라우렐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검은 덩어리의 숙주가 된 적이 있어서 이 일이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심지어 한 나라를 책임져야 했기에 그저 막막할 터였다.
“라우렐, 괜찮을 거예요. 프레사와 대공 전하가 계시잖아요.”
아이리스가 라우렐의 손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위로했다.
프레사는 두 사람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오늘 라우렐과 만나게 된 진짜 목적을 꺼냈다.
“결국 확실한 건 세계수의 근처에라도 근접하는 것뿐이라고 판단했어요.”
“뿌리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을 텐데요, 프레사. 그저 끝없는 숲만 이어질 뿐이었지. 돌아 나오는 데에 꽤 애를 먹었어요.”
라우렐은 이미 뿌리에 근접했던 사람이었기에 단번에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대에게…… 힘든 일이 될 텐데요.”
“전 혼자가 아닌걸요.”
프레사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정말 괜찮았다.
‘리스 님과 약속을 이제라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프레사는 꽤 오래전, 리스를 세계수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그 약속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리스가 그녀를 도와주고 소중히 여겨준 것처럼, 그녀에게 리스 또한 계약 정령만이 아닌 소중한 친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할 이들이 있어 든든했다.
프레사는 옆자리에 앉은 리카온을 쳐다보았다.
리카온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마주 응시했다.
다정한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프레사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하지만 정작 라우렐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 손가락만 탁자 위에 톡톡 두드렸다.
아이리스 역시 프레사가 걱정되는 눈치였다.
프레사는 두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재차 말문을 열었다.
“폐하, 당장 뿌리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는 어차피 저도 되지 않았어요. 다만 뿌리 근처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얻은 답을 통해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테니까요. 저를 믿어 주세요. 이미 그러셨던 것처럼요.”
프레사는 바로 뿌리로 갈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뿌리는 접근이 어려울 테니 그곳에 들어갈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바로 요정의 지도와 문을 통과할 방법이었다.
프레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뿌리 근처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친부모였다.
‘내 친부모님을 만난다면 내 출신을 확신할 수 있어. 내가 정말 요정족과 관련되어 있다면 뿌리로 가는 방법을 찾기 더 수월할 거야. 물론 검은 덩어리에 노출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면 돼.’
여러 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것들이 있었으나 벌써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친부모를 만나 첫 단추를 끼운 다음 순서를 정하면 충분할 것이다.
프레사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라우렐을 응시했다.
라우렐은 그녀와 잠시 마주 눈을 맞추다가 이내 응접실 밖을 향해 말했다.
“페놀 경.”
곧장 문이 열리고 루이제가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그대가 프레사의 여정에 동행해 주겠나? 뿌리 근처의 마을에 가게 됐으니 든든한 호위 기사가 필요할 테지.”
“영광입니다.”
프레사가 거절할 새도 없이 루이제가 빠르게 답했다.
프레사는 얼떨떨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루이제는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라우렐이 덧붙였다.
“모든 지원은 내가 할 테니 그대는 그대의 일에 집중해요. 지난번 사기꾼 사건과는 사뭇 다를 테지만, 이번에도 빚을 지게 됐군요.”
“아직 빚이라고 부르시기에는 이른걸요. 감사합니다, 폐하.”
프레사는 예의를 갖춰 감사 인사를 남겼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리스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꼭 붙잡으며 말했다.
“부디 몸 조심히 돌아와요, 프레사. 정원에서 레몬 케이크를 준비해 기다릴게요.”
“케이크가 녹지 않도록 서둘러야겠네요.”
프레사가 마주 손을 잡으며 장난스럽게 내뱉자, 아이리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곧 리카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프레사를 잘 부탁드려요, 대공 전하.”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죠.”
리카온은 뻔뻔하게 대꾸하고 프레사를 응시했다.
프레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