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99화
일단 리카온과 제드 그리고 루이제야 이미 확정된 사람들이었으니 상관없었다.
문제는 다른 이들이었다.
프레사는 리스가 앉아 있는 화분을 품에 안은 채 그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마치 자기소개라도 하듯 차례차례 말문을 열었다.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제롬이 프레사의 눈치를 살피며 웅얼거렸다.
프레사는 잔소리하려다 말고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채 그를 응시하다가 옆을 보았다.
아이작이 팔짱을 꼰 채 서 있다가 말했다.
“꼬리는 저도 여러 이유로 자주 들렀던 곳이니 안내자로 따라가겠습니다. 적어도 이 빨간 머리보다는 도움이 될 겁니다.”
딱 봐도 본인을 지칭하는 말에 제롬이 미간을 좁혔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오신다는 연락도 없으셨잖아요.”
프레사가 황당한 투로 내뱉자 아이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일도 있는 법이죠.”
“네, 뭐. 멀리서 오셨으니 가시라고 하진 못하겠네요.”
“오랜만에 만나는데 이런 냉대일 줄은 몰랐는데요.”
프레사가 다소 무덤덤하게 되받아치자 아이작이 도리어 당황한 기색이었다.
프레사는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이었어요. 케이드 씨가 오실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요.”
“……제국에서 지내시더니 장난이 느셨습니다.”
아이작이 그제야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특유의 떨떠름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케이드 씨가 같이 가 주시면 엄청 든든하죠. 길드 일도 바쁘실 텐데 정말 고마워요.”
“대신 나중에 사업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으니 그때 좋게 봐주시죠.”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프레사는 사업가다운 아이작의 말에 빙긋 미소 짓고 뒤를 돌아보았다.
리카온은 아이작과 제롬의 등장이 영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고 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을 바꾸었다.
“당신 주변은 늘 소란스럽군요, 레사.”
“저도 이번에는 정말 예상 못 했어요.”
프레사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아이작에게는 당분간 약 수급이 힘들어질 테니 동업자로서 연락했을 뿐이고, 제롬은 로렌을 부탁하느라 사정을 알렸을 뿐인데 이렇게 될 줄이야.
“당신 곁에는…….”
나만 있으면 좋을 텐데.
성큼 바로 옆으로 다가온 리카온이 프레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프레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리카온의 표정은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날 서 있는 듯했다.
‘설마 질투하는 건가?’
또 이런 귀여운 모습이라니.
프레사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리카온은 심각한데 거기에 대고 웃어서는 안 되니까.
“그럼 이제 출발합니까? 자, 여기 부탁하셨던 스크롤입니다.”
분위기를 깬 사람은 아이작이었다.
그가 내민 것은 꼬리의 좌표가 기록된 스크롤이었다.
아이작이 이 여행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스크롤 때문이었다.
세계수 근처로 통하는 지정 좌표 스크롤은 워낙 희귀한 매물이라서 마탑의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리카온도 구하기 어려워했다.
이 세상의 마법이라는 마법은 모두 마탑을 통해서 나오는데도 세계수는 마탑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온갖 것을 취급하는 길드의 마스터답게 꼬리의 스크롤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길드 마스터라서가 아니라 그가 꼬리에 드나드는 요정 혼혈인 이유가 큰 듯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프레사는 감사히 스크롤을 건네받은 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왕!”
얌전히 프레사 옆에 앉아 있던 클로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한번 짖었다.
프레사는 한 팔로 화분을 껴안은 채 잠시 고민했다.
‘클로 씨는 어떻게 하지?’
클로를 이 여행에 데려가기로 한 이유는 하나였다.
혹시 꼬리에서 클로를 사람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찾을지도 몰라서였다.
꼬리는 소수의 요정과 요정 혼혈 인간이 모여 산다고 들었다.
그들에게는 인간과는 다른 지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컸다.
어쨌든 리스가 능력을 비축하기 위해 잠들어 있는 화분을 든 채 클로까지 안기는 무리였다.
‘리카온 씨는 클로 씨를 위해서라도 안 될 것 같고, 케이드 씨는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어.’
그렇다고 루이제에게 부탁하기에는 호위 기사로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듯했다.
결국 남는 사람은 단 한 명, 제롬뿐이었다.
프레사는 제롬을 쳐다보았다.
“제롬, 이 강아지 좀 안고 가 줘.”
“내, 내가?”
제롬이 화들짝 놀라 프레사를 응시했다.
“왜? 개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잖아.”
“그건…….”
제롬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으르릉…….”
클로 역시 프레사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롬을 향해 이빨을 보였다.
“클로 씨, 조금만 참아요. 마법 스크롤을 사용하려면 사용하는 사람과 닿아야 해서 어쩔 수 없으니까요.”
“왕…….”
클로는 프레사가 다정히 달래자 마지못해 수긍했다.
제롬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클로를 안아 들었다.
클로는 불만이 가득한 낯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자, 그럼 준비가 끝났으니 출발할까요?”
경쾌한 프레사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드디어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