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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1화 (101/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1화

그 순간은 아주 느리게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프레사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페도르를 바라보았다.

‘병에 걸린 걸까? 무슨 병이지? 내가 치료할 수 있을까?’

이제야 재회한 아버지가 갑자기 피를 토했음에도 프레사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했다.

“여보!”

샤를이 비명처럼 페도르를 부르며 황급히 수건을 들고 와 건넸다.

페도르는 여전히 기침을 토했고, 회색 수건은 금세 거뭇하게 물들었다.

“괘, 괜찮아. 그저 기침이 심한 것, 뿐이니…… 콜록! 콜록!”

페도르가 프레사를 바라보며 말했으나 프레사의 눈에 그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프레사가 걱정할까 달래는 말일 뿐이었다.

“일단…… 쉬시는 게 좋겠어요. 되도록 옆으로 누워 계시고요. 피가 역류하면 기도가 막힐지도 몰라요.”

프레사는 그렇게 말하며 샤를을 쳐다보았다.

“곧 돌아올 테니 기다려 주렴.”

고개를 끄덕인 샤를은 곧장 페도르를 부축해 침실로 사라졌다.

잠시 가만히 앉아 있던 프레사는 다른 이들을 향해 차분한 투로 내뱉었다.

“혹시 전염력이 있는 병일지도 모르니 다들 가만히 계세요. 제가 확인할게요.”

“레사.”

리카온이 곧장 미간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으나 프레사는 단호했다.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리카온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마자 프레사는 리스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

때마침 침실에서 대야와 수건을 들고 나오던 샤를이 그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이런 증상이 나타났단다. 그래도…… 기침만 심했는데 오늘은 상태가 안 좋구나.”

“제가 잠시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미안하지만 부탁해도 될까? 나는 물을 갈아서 올게.”

샤를은 억지로 미소 지었으나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프레사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샤를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한 번 꼭 붙잡았다가 곧 놓아주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프레사는 그녀의 자그마한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침실로 들어섰다.

그새 더 창백하게 질린 페도르가 낡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프레사는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리스가 씁쓸한 투로 말했다.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요정족이라면 응당 존재해야 할 그것 말이다.」

프레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세계수의 가호가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지. 이대로라면 요정이란 존재가…… 소멸할지도 모르겠구나.」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너는 나의 계약자다. 그리고 나는 네 소망을 들어줄 의무가 있지.」

리스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프레사는 페도르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돌려 리스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간단히 말하자면 내 마력을 나누어주면 된다. 세계수가 온전히 힘을 되찾기 전까지는 임시방편이겠지만.」

프레사는 눈을 크게 떴다.

리스의 마력은 곧 세계수의 힘이었고, 리스는 지금껏 힘들게 되찾은 능력을 다시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세계수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세계수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프레사는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리스 님이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안 돼요.”

「……어째서냐. 이제야 겨우 돌려받은 가족이잖느냐.」

“세계수가 무너지면 제 가족도, 리스 님도, 이 세계도 전부 사라질 테니까요. 세계수에게는 리스 님이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리스 님도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고요.”

프레사가 워낙 단호하게 말한 탓인지 리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프레사는 그가 다시 고집을 부리기 전에 서둘러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 마력은요? 저에게도 능력이 있으니까 마력이 존재하지 않나요? 게다가 혼혈이지만 요정이잖아요.”

리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너는 그걸 다룰 줄 모르지 않더냐. 쉬운 일이 아니다.」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죠. 제가 쉽게 포기하는 걸 본 적 없으시면서요.”

프레사는 미소 짓고 리스를 톡 건드렸다.

리스는 작은 좁쌀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곧 프레사의 손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지. 하지만 명심하거라. 잘못된 방식으로 접근할 경우…… 네 아버지가 잘못될 수도 있다. 마력은 그만큼 섬세하고 특히 요정의 마력은 더욱 다루기 힘든 법이니까.」

프레사는 그 말을 듣자 조금 긴장했으나 리스를 손등 위에 올린 채 조심스레 페도르의 손을 잡았다.

피를 많이 토한 탓인지 페도르의 체온은 서늘했다.

프레사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줘서 그를 붙잡았다.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벌써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전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프레사는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리스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씨앗을 심고, 그것을 네가 원하는 수준까지 성장시켰던 순간을 떠올려 보거라. 그것과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네 마력의 크기를 키워서 상대에게 전달하는 거니까.」

“네.”

프레사는 작게 심호흡한 후 천천히 손의 힘을 풀고, 리스가 말한 것처럼 식물을 키웠던 때를 떠올렸다.

우연히 씨앗을 건드렸다가 새싹이 난 걸 본 바로 그 순간, 프레사의 삶은 달라졌다.

완결 이후의 삶을 기대했고 소망하는 것이 생겼으며 꿈이라는 것을 품었다.

그저 욕이나 먹고 말 소설 속 악역의 아닌, 이 세계에서 살아 갈 한 명의 사람으로서 목적이 생겼다.

그렇기에 더욱 샤를과 페도르를 돕고 싶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음에도 단번에 딸을 알아볼 만큼 간절했던 그들의 마음이 전해져 온 탓이었다.

‘제발.’

프레사는 두 눈을 감고 오로지 내면의 흐름에 집중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심장 어딘가에서부터 찬찬히 새어 나와 전신을 타고 흘러가는 듯했다.

단순히 식물을 키울 때와 다른 묘한 감각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잘하고 있다. 그 힘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전해야 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말이다.」

프레사는 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주 조심스레 마력을 전달했다.

마력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간절함과 바람, 새싹을 키워 낼 때마다 느꼈던 감정까지 전부 담아서.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아주 옅은 푸른빛이 흘러나오더니 페도르의 손으로 흡수되었다.

프레사는 이러한 과정에서 기이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저 페도르에게 마력을 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무언가 가슴 벅찬 것들을 돌려받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하면 될 듯하다.」

리스가 그렇게 내뱉는 순간.

“……레사?”

페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사는 천천히 눈을 떠서 그를 바라보았다.

페도르의 안색은 그새 꽤 괜찮아진 듯 보였다.

‘다행이야. 내가 해냈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온몸의 긴장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프레사는 지친 기색을 감추고 미소 지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페도르는 프레사가 꼭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상체를 일으켜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내뱉으며 말했다.

“네가…… 마력을 나누어준 거구나. 어떻게 알았지? 평생 인간으로 살았으니 요정족에 대해 잘 모를 텐데…….”

“저를 도와주는 정령님이 계시거든요.”

“……고맙다, 레사. 나는 너를 지키지 못했는데도 너는 나를…….”

페도르의 눈가로 눈물이 맺히더니 툭, 떨어져 프레사의 손등 위를 적셨다.

눈물의 온도가 따뜻한 탓인지 금세 프레사의 마음까지 슬픔이 퍼져나갔다.

프레사는 그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지키지 못하신 게 아니에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니까요. 저는 부모님을 탓하지 않아요.”

정작 프레사에게 사죄해야 할 소프 백작 부부는 영영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굳이 사과받기 위해 만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가문을 무너트렸으니 이미 복수는 성공한 셈이었다.

프레사의 말에 페도르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간신히 내뱉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그때 샤를이 돌아왔다.

“여보? 레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샤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프레사와 페도르를 번갈아 보았다.

“레사가, 우리 아이가…… 마력을 나눠 줬어.”

“대체 어떻게……. 레사, 몸은 괜찮은 거니?”

샤를은 페도르의 설명을 듣더니 프레사의 몸부터 살폈다.

프레사가 괜찮다고 대답하려는 그때, 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사. 잠시 나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리카온이 드물게 심각한 표정으로 프레사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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