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2화 (102/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2화

프레사는 페도르의 손을 놓고 일어나 리카온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이쪽은…… 잘 해결됐군요. 다행입니다. 당신은 괜찮습니까?”

리카온은 뒤쪽의 코테즈 부부를 힐끔 쳐다보더니 곧장 프레사를 살폈다.

프레사는 개운하게 웃어 보였다.

“네.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리카온 씨 표정이 안 좋던데…….”

“마을을 살피러 갔던 이들이 돌아왔는데, 당신이 직접 듣고 판단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루이제와 제드 그리고 아이작이 벌써 돌아온 모양이었다.

눈이 그치기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굳이 서둘러 다녀오겠다더니 정말 빠른 복귀였다.

프레사는 알겠다고 대꾸한 뒤 샤를과 페드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쉬고 계세요. 저는 동료들과 얘기 좀 나누고 올게요.”

“편히 다녀오렴.”

그새 잠든 페드로를 대신해 샤를이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가족의 배웅을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프레사는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을 간직한 채 리카온과 함께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에는 머리카락과 어깨에 쌓인 눈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세 사람이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페놀 경, 제드 씨, 케이드 씨.”

프레사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들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루이제였다.

“가족분들과의 시간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다만 급한 일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아요. 이제 막 잠드셨거든요. 무슨 일이죠?”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털어내던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반점이 생긴 병자를 만났습니다. 레사 님의 하녀도 같은 증상을 앓았다고 들었는데요.”

프레사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로렌과 같은 증상을 겪는 이들이 이 마을에 있다는 뜻이었다.

‘세계수와 연관이 있는 곳이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하기는 했어.’

아까 페드로의 상태를 처음 봤을 때는 어쩌면 로렌이 겪은 것보다 더 심한 전염병이 돌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었다.

다행이라고 한다면 다행이지만, 페드로는 마력을 채우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렌과 같은 증상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증상은 제각각으로 달라졌다.

라우렐과 비슷한 검은 덩어리를 토했던 아이작은 비교적 가벼운 몸살이었지만, 라우렐은 마력이 폭주해 이성을 잃었었다.

로렌은 검은 반점과 고열, 무기력을 앓았으니 아예 다른 병처럼 보일 정도였다.

‘종족마다 증상이 다른 건가?’

아이작은 혼혈 요정, 라우렐은 마력을 지닌 인간, 로렌은 마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반점이 나타났다는 마을 사람들은 아마 인간일 가능성이 컸다.

프레사는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요?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일단 눈이 좀 그치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거든요.”

가장 뒤쪽에 서 있던 제드가 피로에 찌든 눈으로 프레사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프레사는 눈이 휘몰아치는 창밖을 내다보고서 곧 수긍했다.

“그게 좋겠네요. 다들 좀 쉬세요. 고생하셨습니다.”

꼬르륵.

갑작스러운 소리에 프레사를 포함한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집안 장식품처럼 조용히 있던 제드가 얼굴을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갛게 붉힌 채 서 있었다.

“미, 미안…….”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후로 모두 차와 쿠키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허기가 질 만했다.

때마침 거실로 나온 샤를이 프레사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겠네. 집은 좁지만, 소파와 식탁에 앉으면 어떻게든 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줄래?”

“감사해요.”

프레사는 여전히 샤를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고마웠다.

한두 명도 아닌데 식사를 준비해 준다니 보통 일이 아닐 터였다.

아이작 또한 프레사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냉큼 끼어들었다.

“이거 머릿수가 너무 많은데, 우리가 좀 돕죠.”

“저, 저도 돕겠습니다!”

제롬이 의욕적으로 나섰다.

뒤이어 다들 돕겠다고 하는 바람에 샤를이 몇 명만 골라서 주방으로 데려갔다.

프레사는 얼떨결에 뒤로 밀려나 벽난로 앞에 홀로 앉아 있게 되었다.

그녀 곁에는 어느새 카펫 위에서 잠든 클로와 프레사 어깨 위의 리스뿐이었다.

심지어 리카온과 루이제까지 주방으로 갈 줄이야.

프레사가 멍하니 타오르는 벽난로 안을 응시하는데 리스가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오늘 고생했다, 레사야. 너에게는 정말…… 기이한 힘이 있어. 너를 만난 것이 내 행운이구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프레사는 조금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였다.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었어요. 리스 님을 만나서 지금껏 온갖 일을 헤쳐 나왔는걸요.”

우연히 얻은 세계수 가지를 되살리겠다고 능력을 썼고, 잠들어 있던 세계수의 정령과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서로가 서로에게 행운인 셈이었다.

프레사는 굳이 그 감정을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표현했다.

“아직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일이 남았지만, 전 걱정되지 않아요. 리스 님의 조언을 따르다 보면 어떻게든 끝이 나더라고요. 아마 다음에도 그럴 거예요.”

「……그래, 그럴 거다. 이제 정말 세계수의 지척까지 왔다는 느낌이 든다.」

리스는 프레사의 목에 기대듯 앉으며 중얼거렸다.

「세계수의 목소리가…… 들렸으니.」

“세계수의 목소리요? 무슨 말을 했는데요?”

「나를…… 기다리고 있다더구나.」

리스의 목소리는 점점 가라앉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프레사는 그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에게도 이번 여정은 꽤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리스 님.”

작게 속삭인 프레사는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벽난로를 다시 응시했다.

이따금 주방 쪽에서 리카온과 샤를이 번갈아 나와 프레사에게 간을 보라고 했고, 제롬은 말을 거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주변을 서성거리다 돌아갔다.

아이작은 요리에 진심인지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고 주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루이제는 좁은 주방을 벗어나 감자를 깎으러 거실까지 나와 지금도 감자를 깎고 있었다.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감자 깎는 데에도 발휘할 기세였다.

프레사는 다소 소란스러운 집안 풍경을 한 번씩 눈에 담았다가 다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눈보라는 여전히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으나 프레사가 속한 공간은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인데도, 꼭 이곳만 새로운 봄인 것처럼.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