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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3화 (103/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3화

프레사는 침대에 누워 어둑어둑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만든 규칙이었기에 이제 와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어 결국 침실에서 잠을 청했다.

‘설마 리카온 씨와 같은 곳일 줄은 몰랐지.’

물론 리카온과 둘만 있는 건 아니었다.

프레사의 옆구리에는 클로가, 침대 옆에 놓은 화분에는 리스가 자리 잡고 누워 있었다.

샤를은 프레사가 성인 남성과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걱정을 내비쳤지만, 클로와 리스가 함께인 데다가 바로 옆 거실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수긍했다.

물론 샤를이 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요정과 결혼한 탓인지 리스의 존재를 금세 받아들였다.

‘애초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텐데.’

프레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빼앗겼던 자식과 겨우 재회한 어머니의 심정은 조금 다르겠지 싶어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리카온 씨는 벌써 잠든 걸까??’

프레사는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반듯하게 누워 있다가 리카온 쪽으로 살짝 돌아누웠다.

리카온은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새삼 그에게 참 안 어울리는 장소였다. 대공이자 마탑주인 리카온이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잠을 자게 되다니 내일 제드가 꽤 얄밉게 놀려 댈지도 몰랐다.

벌써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해 속으로 웃음을 삼킨 프레사는 리카온에게 말을 걸었다.

“리카온 씨, 주무세요?”

“……아직 안 잡니다. 당신은?”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곧 뒤척이는 소리가 나더니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리카온의 눈동자가 프레사를 바라보았다.

프레사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나직이 말했다.

“아직, 잠이 안 오네요. 낯선 장소라서 그런가 봐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고생했어요, 레사.”

리카온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내뱉었다.

이미 저녁 식사 시간에 그녀가 어떻게 페도르를 치료했는지 설명한 후였다.

프레사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리카온 씨도요. 요리 실력이 더 좋아지신 것 같던데요.”

“원래부터 요리는 잘했습니다. 물론 그것 말고도 잘하는 게 많아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리카온 씨는 가끔 이렇게 잘난 티를 낸다니까요.”

“그래서 싫어진 것도 아니면서.”

“네, 네. 전 뻔뻔한 리카온 씨가 좋더라고요.”

프레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내뱉자 이번에는 리카온이 조용해졌다.

그새 잠들었을 리는 없으니 다른 생각 중이거나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클로와 리스가 깨지 않도록 조그맣게 리카온을 불렀다.

“리카온 씨?”

리카온은 그제야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당신이 이 일에서 손을 뗐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모여 있을 때 리카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읽기 힘든 표정으로 프레사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부터 프레사는 그가 무슨 마음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리카온은 지금 프레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처지가 바뀌었다면 프레사 또한 리카온을 염려했을 테니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리카온의 목소리는 더없이 신중했고 그 내용 또한 간결했다.

하지만 프레사의 대답은 분명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리카온 역시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그저 감정을 드러내고 싶어서겠지.

프레사는 생각을 고른 후에 담담히 대꾸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아시면서요. 제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또 나서야 할 텐데 리스 님의 계약자는 저뿐인걸요.”

“너무 위험한 길이잖아요.”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모두가 위험해질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고 싶어요. 리카온 씨를 위해서도요.”

프레사의 말에 리카온은 다시 입을 닫았다.

프레사는 굳이 말을 걸지 않고 그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가만히 두었다.

클로의 숨소리까지 느껴질 만큼 고요해졌을 때, 리카온이 다시 말했다.

“지난번에 했던 말 기억합니까?”

“어떤 말이요?”

“내가 당신을 배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었다는 말.”

아.

프레사는 그제야 지난번에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리카온은 그때 분명 프레사와 다른 곳에서 만났던 것처럼 굴었다.

하긴 처음부터 리카온은 이상할 만큼 프레사에게 적극적이었다.

프레사가 그토록 대놓고 경계했음에도 말이다.

“그때가 아니라면 언제 저를 처음 봤는데요?”

“어느 연회였습니다. 당신이 전 길레스피 백작에게 매달렸을 때.”

당연히 원작 내용이었을 테니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필 로완 길레스피에게 매달릴 때라면 더욱 별로였겠지.

프레사는 머쓱한 투로 중얼거렸다.

“……썩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겠네요.”

그러나 리카온은 의외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뇨. 난 그때 당신과 눈이 마주쳤고 당신이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연극이라는 것도.”

모두가 프레사를 동정과 혐오의 눈으로만 바라보았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이 완전한 외부인이었던 리카온에게는 보였던 모양이었다.

리카온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기이할 만큼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으니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프레사는 어떻게 그걸 알아차렸는지 굳이 묻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훨씬 오래전에 만났던 거네요. 그럼 왜 그때 아는 척 안 했어요?”

“나 혼자만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뜸 멀미약을 준 것부터 수상했거든요.”

“그 멀미약은 마셨습니까?”

프레사는 잠깐 멈칫했으나 솔직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은 안 할게요. 당시에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바다에 버렸어요. 미안해요.”

리카온이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야 당신다우니까.”

파사삭.

창문 밖에서 눈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편하다더니, 프레사는 리카온과 함께일 때 종종 그런 기분을 느꼈다.

리카온은 그녀에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득 침묵 속에서 꺼내고 싶은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갑작스러웠으나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프레사는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며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리카온 씨, 만약 이 세상이 누군가가 쓴 소설 속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실제로 프레사의 이야기였으며 모든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다른 점이라면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만 존재했을 뿐, 이외의 이들은 그저 조연일 뿐이었다.

물론 조연도 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지만.

어쨌든 완결 이후 이야기의 주인공은 앨리샤와 로완이 아닌 이 세계에 속한 모두였다.

리카온은 이번에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프레사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파삭, 후드득, 투둑.

창문 옆 나무에 쌓여 있던 눈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리카온은 그 소리가 파묻힐 때가 되어서야 대답했다.

“당신이 주인공이었으면 좋겠군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답이었다.

물론 프레사는 그녀를 포함한 이곳의 모두가 각자의 삶을 지켜나가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리카온처럼 누군가가 주인공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프레사가 넌지시 되묻자 리카온이 이번에는 곧장 대답했다.

“바라는 결말이 있거든.”

리카온은 어떤 결말을 바라는 걸까.

하지만 리카온의 목소리와 말투에서 느껴지는 감정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프레사는 산뜻한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무척 고마운 얘기지만, 저는 리카온 씨가 주인공이었으면 좋겠어요.”

“이유는?”

“소설 속 주인공은 대부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강인한 사람인 법이니까요. 리카온 씨는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강하거든요.”

로완이 아니라 리카온이 주인공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아예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주인공 리카온이라니, 충분히 잘 어울리지 않나?

프레사가 그런 뜬금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리카온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말은 고맙지만, 내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난 당신이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럼 각자의 주인공으로 서로를 생각할까요? 좀 민망하긴 하지만, 힘들 때 떠올리면 의외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뭐, 그렇게 하죠.”

반쯤 장난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리카온이 예상보다 손쉽게 받아들이는 바람에 그렇게 결정되었다.

우습게도 이제 서로에게 서로가 주인공인 셈이었다.

프레사는 작게 웃은 후 나른히 하품했다.

어느덧 밤이 깊은 탓인지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는 반쯤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만 잘까요?”

“잘 자요, 레사.”

“잘 자요, 리카온 씨.”

프레사는 리카온 쪽을 바라보는 그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그러나 리카온은 눈을 감았다가 도로 뜨고 프레사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아마 그에게는 잠들 수 없는 밤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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