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5화
프레사는 더없이 바빠졌다.
파로 마을에서 일할 때도 바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결이 달랐다.
그때는 단순한 개인의 욕심으로 생긴 할 일들이었으나 지금은 소중한 이들과 이 세계를 위해서였다.
프레사의 편지를 전달받은 라우렐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프레사는 꽤 많은 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녀가 궁금한 이야기는 바로 혼혈 요정의 마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이작에게 어느 정도 들은 정보가 있기는 하나 그 또한 뿌리를 오갈 자격이 있을 뿐, 요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저는 기억이 날 때부터 왕국에서 살았으니까요. 뿌리는 거래를 위해 드나든 것뿐입니다. 그것도 마을 가까이는 저도 접근하지 못했고요.’
프레사는 아이작의 말을 떠올렸다.
아무리 뿌리가 그의 고향이라고 해도 확실히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냉정한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바로 그 뿌리의 보호 마법에 대해 조사 중이었다.
아주 긴 세월 동안 세계수로 가는 길목을 지켜온 뿌리는, 외부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
리스는 그것이 세계수의 마법이라고 했다.
즉 해제할 방법이 거의 없다는 의미였다.
‘리스 님의 능력이라면 보호 마법을 뚫고 지나갈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야.’
프레사도 아이작과 같은 혼혈 요정이었으니 마을 근처까지만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도 아닌 동료들과 뿌리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만 했다.
‘마법은 잘 모르지만…… 인간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과는 꽤 다른 모양이야.’
이미 리카온에게 설명 들었음에도 프레사에게 마법은 여전히 어려웠다.
마법을 이해하기 위해 관련 서적도 여럿 읽었으나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그래도 아예 소득이 없던 건 아니야.’
프레사는 책에서 찾은 정보와 다른 이들이 알려준 정보를 꼼꼼하게 메모했다.
그 정보들을 한 번에 살펴보니 뿌리의 마법을 아주 잠시 무력화할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실험해 보지 않는 이상은 확신할 수 없었고, 구하기 까다로운 재료도 포함이었다.
‘그중 가장 문제는 요정족의 마법이란 말이지.’
프레사가 아는 요정은 페도르뿐인데, 그는 현재 회복 중이었으니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프레사와 아이작은 혼혈인 데다가 아이작은 마법이라고는 전혀 몰랐다.
‘혼혈 요정의 마법도 소용이 있는지가 중요한데 확인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네.’
프레사는 펼친 책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톡톡 탁자를 두드렸다.
‘리스 님이라면 무슨 방법을 아실지도 몰라.’
프레사는 일단 방으로 돌아가면 리스와 상의해 봐야겠다고 결론 짓고서 책을 덮었다.
며칠 내내 책에만 붙잡혀 있었더니 머리가 지끈거려서 이제 더는 못 읽을 정도였다.
다행히 다음 순서는 조제법 연구였다.
‘일단 재료를 먼저 정리하고, 다음은 손질 방법 그리고 조합 순서…….’
약물 조제법을 처음 만드는 건 아니었으나, 이번만큼 복잡한 적은 처음이었다.
프레사는 신중하게 약초와 다른 재료의 효과를 메모하며 조제법을 여러 개 적어 나갔다.
그 누구도 만든 적 없는 특별한 약을 만들어야 했기에 신경이 곤두섰다.
“시, 시키실 일은 더 없으신가요?”
때마침 빨래를 널러갔던 메리가 돌아와 프레사에게 말을 걸었다.
프레사는 또 뭘 시켜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괜찮다고 말하면 분명 근처에 서성거리며 눈치를 볼 테고, 어려운 일을 시키면 사고를 칠 테니 말이다.
‘정말 착한 사람이지만, 이런 건 별개지.’
프레사는 몇 초 동안 고민한 끝에 탁자 위에 쌓인 책더미를 가리켰다.
“아, 이 책 정리 좀 부탁할게. 그리고 이제 쉬어도 돼.”
“네, 맡겨만 주세요!”
메리는 씩씩하게 말하고 책을 집어 들었지만, 너무 큰 욕심을 낸 것이 문제였다.
두 팔 가득 책을 안고 가던 그녀의 품에서 책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와르르 쏟아졌다.
프레사는 이마를 짚으며 엉망으로 떨어진 책과 메리를 번갈아 보았다.
“죄, 죄송해요! 빨리 치우겠습니다!”
메리가 허둥지둥 책을 주워 챙겼으나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 순간, 또 다른 사람이 약제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제가 다녀왔습니다! 스승님, 이제 연구를 도와도 괜찮겠습니까?”
바로 레인이었다.
그 역시 프레사가 시킨 대로 오래된 약병을 닦고 돌아온 참이었다.
‘메리도 레인 씨도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적당히 시간을 끌 계획이었는데 영 틀려먹었다.
레인은 프레사가 꼬리에서 돌아온 후부터 계속 찾아왔다.
바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들러붙는 걸 보니 분명 목적이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세계수 때문인 것 같은데 말이지.’
프레사는 리카온에게 조만간 레인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결론 내린 후 대답했다.
“레인 씨는 그럼 이 마법을 써 주실 수 있나요?”
“마법이라면 자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레인은 무슨 마법인지 묻지도 않고 냅다 손가락 끝에서 불꽃을 피웠다.
프레사는 손을 내저었다.
“불이 아니라, 이거예요. 보호 마법이요.”
“……보, 호…… 말입니까?”
레인이 흐릿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스승님. 저는 공격 마법에 특화되어서요. 아예 걸어 온 길이 다릅니다, 네.”
레인이라면 못 하는 것도 할 줄 안다고 말할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프레사는 책에 적힌 마법 문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간단한 건데 정말 안 될까요?”
레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손끝을 쳐다보더니 고민에 빠졌다.
정말 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곤란한 건지 잘 모르겠다.
프레사는 레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넌지시 말했다.
“어려우시면 리카온 씨에게 부탁해야겠어요.”
사실 리카온은 그 나름대로 바쁘기에 부탁할 마법사는 레인뿐이었다.
해보지도 않고 못 한다고 발뺌하는 모양새가 영 수상해서 리카온을 언급한 것이다.
지금껏 프레사가 지켜본 레인은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었으니 분명 자극받았을 터였다.
프레사의 예상대로 레인이 조용히 대꾸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한번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시간을 좀 주세요.”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부탁드려요.”
프레사는 빙긋 웃고 그에게 책을 넘겨주었다.
레인은 살짝 불퉁한 얼굴로 책을 들고 구석 자리로 가 버렸다.
프레사는 메리와 레인을 둘 다 떼어내고 나자 그제야 한숨 놓은 기분이었다.
‘리스 님께 오늘 찾은 정보를 알려드려야겠어. 점심도 먹고.’
프레사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프레사는 메모장을 챙긴 후 문을 열었다.
“아가씨, 잠깐 괜찮으세요?”
문 앞에는 로렌이 옅게 미소 지으며 프레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