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6화
“물론이지. 오랜만에 같이 산책할까? 아, 제롬은?”
프레사는 로렌과 나란히 걸어가며 물었다.
로렌이 곧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클로 님을 산책시키러 나가셨어요.”
프레사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둘이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꽤 잘 맞나 봐.”
제롬은 마탑에 온 후부터 줄곧 클로를 돌보는 역할을 자진해서 맡았다.
덕분에 프레사가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 줄어들어 고맙기는 했다.
‘예전과는 정말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제롬은 오만하고 시건방지던 과거 모습을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지만, 제롬에게는 조금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그 짙은 붉은색 머리칼만 봐도 소프 가문이 떠올라 조금 거북한 건 여전히 어쩔 수 없었다.
프레사는 자연스럽게 떠오른 소프 가문의 사람들을 지워내며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로렌은 잠시 머뭇거렸다.
프레사는 그 반응을 보자마자 그녀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단번에 알아차렸으나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두 사람은 어느새 마탑을 내려와 해변에 도착했다.
저 앞에는 제롬과 클로가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둘 다 털이 붉은 탓인지 멀리서도 잘 보였다.
프레사는 얇은 신발 밑창에 닿는 모래의 감촉이 좋아 그 감각에 집중하며 걸어 나갔다.
바람을 타고 밀려들어온 파도 소리가 제법 거세다고 생각하는 순간, 로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그게…… 꼬리라는 곳에 다녀오신 후로 못 뵈어서요. 잘 다녀오셨나 궁금했어요. 물론 별일 없으셨겠지만…….”
“친부모님을 만난 얘기가 궁금한 거지?”
푸르른 바다 너머를 응시하던 프레사가 빙긋 웃으며 로렌을 바라보았다.
로렌은 눈만 깜빡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으신지 뵈러 온 거예요. 벌써 눈치채셨었나요?”
“물론이지. 내가 로렌과 지낸 세월이 얼만데.”
“……역시 아가씨 눈은 못 속이겠어요.”
로렌이 옅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프레사는 잠시 입을 다물고 점점 더 멀어지는 제롬과 클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막상 설명하려니 어떤 식으로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바로 옆에서 파도가 밀려 들어오더니 빠르게 빠져나갔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프레사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뒤흔들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 로렌이 상냥하게 속삭였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아가씨.”
프레사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따뜻한 봄과 같아서 프레사는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내 친부모님은 음. 엄청 좋은 분들이셨어.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긴 탓인지 아직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코테즈 부부를 떠올렸다.
페도르는 괜찮을까. 샤를은 별다른 문제가 없는 걸까.
꼬리는 꽤 춥던데 감기는 걸리지 않는 건지.
헤어질 때 아쉬워 보였는데…….
그런 사소한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로렌이 다정하게 말했다.
“다행이에요, 아가씨. 친부모님을 찾으셔서요.”
“……고마워, 로렌.”
프레사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마주 웃었다.
로렌에게는 정말 신기한 힘이 있었다.
마법적인 능력이나 특별한 재주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런 힘.
그녀와 대화하면 마음 깊은 곳까지 온기가 퍼지는 기분이었다.
“왕! 왕왕!”
그때 저만치 멀어졌던 클로가 어느새 프레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프레사는 자연스럽게 몸을 낮춰서 클로를 안아 들었다.
“클로 씨, 너무 개처럼 변한 거 아니에요? 물론 지금은 개가 맞기는 한데…….”
“왕?”
프레사가 타박을 줬으나 클로는 순진한 눈으로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아. 프레사, 로렌. 산책 나왔어?”
뒤이어 제롬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다가와 섰다.
프레사는 클로의 턱을 긁어 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응. 고마워, 제롬. 클로 씨를 맡아줘서.”
제롬의 표정이 순간 멍하니 굳었다.
프레사는 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몰라 의아해했다.
“제롬?”
“……어? 아, 아니. 어차피 다른 할 일도 없고…… 나도 밥값은 해야지.”
제롬이 더듬더듬 조금 빠르다 싶은 속도로 대답했다.
프레사는 그제야 그가 프레사의 칭찬이 낯설어서 그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동안 너무 모질게 대하기야 했지만, 이 정도로 어색해할 줄이야.
프레사는 말없이 제롬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슬슬 식사 시간이니 돌아가자, 로렌. 제롬도. 그리고 클로 씨도요.”
“네, 아가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어쩐지 출출했어요.”
“왕!”
“으응.”
프레사는 얼결에 줄줄이 그들을 데리고 마탑으로 돌아왔다.
요즘 그들은 리카온이 마련해 준 꽤 넓은 응접실에서 함께 식사 시간을 보내곤 했다.
주로 드나드는 사람은 프레사와 로렌, 제롬 그리고 클로였으나 리카온도 종종 참여하곤 했다.
단순히 식사만 같이하는 건 아니고 각자 얻은 정보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다.
“난 방에 다녀올 테니까 먼저 식당으로 가 있어.”
일단 리스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방에 다녀와야 했다.
프레사는 일행에게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 앞에 도착하자 처음 느끼는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마탑에서 이런 기운이라니…….
심지어 지금 프레사의 방에는 리스뿐일 텐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리스 님!”
프레사는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방에는 낯선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마치 숲을 옮겨다 놓은 듯 짙푸른 녹색 머리카락이 방 안을 완전히 뒤덮은 채였다.
프레사는 직감했다.
이 낯선 남자는 분명 그와 계약한 세계수의 정령, 리스라는 사실을.
‘처음 계약하던 날 얼핏 봤던 그 모습이야.’
프레사는 기억 속에 남은 리스의 ‘진짜’ 모습을 떠올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리스 님, 괜찮으세요?”
“…….”
리스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프레사는 거미줄처럼 달라붙는 그의 머리카락을 간신히 떼어내며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리스에게 세계수가 말을 걸어 왔다고 했던가.
리스가 능력을 되찾으면 되찾을수록 세계수와의 거리도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것도 세계수 탓일지도 몰라.’
프레사는 제 다리 위를 꿈틀꿈틀 기어오르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우며 소리쳐 리스를 불렀다.
“리스 님! 정신 차리세요!”
그 순간 리스가, 아니 칼리스투스의 모습을 되찾은 그가 아주 느리게 프레사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던 투명한 눈동자 위로 천천히 색채가 돌아왔다.
프레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그를 불렀다.
“칼리스투스 님!”
“……레사.”
칼리스투스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프레사는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 힘껏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칼리스투스의 손은 꼭 죽은 사람의 것처럼 차갑고 시렸다.
동시에 밝은 녹색 빛이 그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프레사는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으나 칼리스투스의 손은 놓지 않았다.
그리고 곧 빛이 사라지더니 차가운 감각 또한 지워졌다.
프레사는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칼리스투스가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이 모습으로 인사하는구나, 나의 계약자야.”
분명 말투와 목소리는 리스였으나,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는 칼리스투스였다.
두 존재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생전 처음 만나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프레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 갑자기 이런 모습이 되시다니.”
“이것이 내 본래의 모습이다. 아무래도 세계수 덕분이겠지. 나를 애타고 찾고 있더구나.”
칼리스투스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 자세가 어찌나 우아하던지 프레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칼리스투스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길이를 줄이더니 이윽고 허리까지 짧아졌다.
“이 정도는 돼야 움직이기 편할 테니. 그나저나 언제까지 잡고 있을 테냐.”
프레사는 그제야 지금껏 칼리스투스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괜찮다. 너도 놀랐겠구나. 내가 능력을 되찾은 만큼 세계수와 공명하는 탓일 것이다. 덕분에 힘도 되찾았으나 그만큼 세계수의 증오도 커졌겠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칼리스투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프레사를 응시했다.
밝은 황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프레사는 홀린 듯 그를 마주 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정말 괜찮으신…….”
그런데 그때 갑자기 천장에서 누가 훅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