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08화
계단 아래로 내려가던 리카온이 걸음을 멈추고 프레사를 돌아보았다.
“아, 레사.”
프레사가 따라올 줄 몰랐다는 듯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프레사는 볼을 긁적이며 계단 난간을 꼭 붙잡고서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리카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프레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프레사는 머쓱해져서 손가락 끝을 세워 난간만 톡톡 두드렸다.
일행이 모두 떠나간 복도는 한산했다.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햇빛이 리카온 뒤로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프레사는 그 까만 그림자를 응시하다가, 곧 들려오는 리카온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세계수의 정령이 저런 모습일 줄은 몰라서.”
“왜요? 듬직하지 않나요?”
“그냥, 뭐.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프레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리카온은 작게 헛기침하더니 입을 도로 닫았다.
프레사는 계단을 천천히 하나씩 밟아 내려갔다.
“리카온 씨, 질투하시는 거죠?”
리카온은 자연스럽게 프레사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걱정하는 겁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거 잘 아시면서요.”
프레사는 리카온의 손을 살짝 붙잡고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 리카온을 올려다보았다.
리카온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대꾸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어른이 되시려면 아직 멀었나 봐요.”
프레사는 능청스럽게 되받아쳤으나 리카온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재차 덧붙였다.
“칼리스투스 님은 세계수로 돌아가실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에는 세계수와 정령의 존재가 필요해요. 리카온 씨도 아시겠지만.”
칼리스투스는 아마 이번 여정의 끝에서 세계수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럼 프레사와의 계약도 자연히 끝나게 될 테고, 프레사는 그를 후련하게 보내 줄 준비를 해야 했다.
물론 아직 실감은 나지 않으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낯설었다.
‘이별이겠구나.’
사람들 앞에서 무덤덤하게 설명했던 것들과 달리 되새겨 보면 아쉬웠다.
지금껏 함께했던 시간이 긴 탓일까.
아니면 그를 스승처럼 따르고 아껴서일까.
사실은 프레사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레사.”
리카온이 프레사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프레사는 칼리스투스 생각을 그만두고 그와 눈을 마주 보았다.
리카온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에게는 이 세계보다 당신이 중요하니까.”
프레사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콩, 콩, 콩.
맥박이 귀 바로 옆에서 뛰는 듯했다.
리카온은 옅게 미소 지으며 프레사의 손을 가볍게 위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세계이니 나 또한 지킬 뿐입니다.”
그는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프레사의 손등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프레사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도로 내쉬었다.
“네, 알아요. 그래서 고마워요.”
“네. 나 역시 알고 있습니다.”
리카온이 자그맣게 속삭이듯 내뱉었다.
여전히 맞닿은 손의 온기가 한여름처럼 뜨거워서 선뜻 빼낼 수가 없었다.
프레사는 그렇게 한참 동안 리카온과 손을 잡은 채 서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더냐.”
진작 방으로 돌아갔을 줄 알았던 칼리스투스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지만 않았어도 계속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프레사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다.
그리고 칼리스투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세계수의 정령은 프레사가 아까 내려온 계단 난간에 턱을 괸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꼭 보호자에게 비밀 연애 장면을 들킨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도, 돌아가요. 방으로. 아니, 약제실로.”
프레사는 고장 난 마도구처럼 삐걱거리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가 멈칫,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리카온은 그녀에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는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시간에 뵈어요, 리카온 씨.”
“네. 이따 봐요.”
리카온이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프레사는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칼리스투스에게 다가갔다.
“먼저 방으로 가신 줄 알았어요.”
“쯧, 내가 계약자를 두고 어딜 혼자 가겠느냐. 기다리느라 힘들어 죽을 뻔했구나. 얼른 돌아가서 쉬자.”
칼리스투스는 거추장스럽다면서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머리칼을 흔들며 먼저 걸어갔다.
프레사는 여전히 낯선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곧장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