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11화
자리를 깔고 바구니에서 샌드위치와 과일을 꺼내 올려놓으니 정말 피크닉 같은 분위기가 났다.
같이 온 동료들은 오늘만은 업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로렌은 마탑산 조개껍데기를 줍고 싶다며 저쪽으로 사라졌고, 아이작은 바다를 싫어하는 척하더니 슬쩍 바닷물에 지팡이를 찔러 보고 있었다.
제롬은 클로와 놀아 주러 갔으며 칼리스투스는 자연을 느끼고 싶다며 맨발로 해변을 거니는 중이었다.
제드는 그를 호위하겠다며 뒤따라 나섰다.
다들 이리저리 흩어지는 바람에 돗자리 위에는 프레사와 리카온 그리고 그 옆에 선 루이제뿐이었다.
프레사는 오늘 품이 넉넉한 흰색 셔츠와 통이 넓은 하늘색 바지를 입었다.
해변 위에 깔린 자리에 앉아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프레사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녀는 그것이 불편해 손목에 감고 있던 끈을 풀어 머리칼을 하나로 모아 높게 올려 묶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한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그렇죠, 리카온 씨?”
“네. 그러게요. 몸은 괜찮습니까?”
리카온은 줄곧 프레사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 곧장 눈을 마주쳐 왔다.
프레사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약속하셨잖아요. 오늘은 그냥 즐겁게 놀기만 하기로.”
“이 정도 질문은 할 수 있잖습니까, 레사.”
리카온이 불퉁하게 되받아쳤다.
프레사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서 머쓱하게 제 볼을 긁적였다.
“어제 푹 잤더니 오늘은 멀쩡해요. 바다에 뛰어들어도 될 것 같다니까요?”
“바다에 뛰어들었다간 감기에 걸립니다.”
“리카온 씨, 점점 더 농담을 안 받아주시네요.”
저 섭섭해요, 하는 표정으로 리카온을 쳐다보자 리카온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으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네, 바다에 뛰어들진 않을게요.”
프레사가 재차 장난스럽게 말하자 리카온이 못 말린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왕! 왕왕! 왕!”
제롬과 해변을 뛰어다니던 클로가 돌아와 프레사를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분명 바라는 게 있는 눈빛이었다.
프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에게로 다가갔다.
“응? 같이 놀자는 거예요?”
“왕!”
클로가 힘차게 대답하곤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같이 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요즘 제롬에게만 맡겨 놓고 좀처럼 놀아 주지를 못했네.’
클로가 진짜 강아지였다면 프레사는 최악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클로는 정말 착한 강아지였겠지.
“리카온 씨도 같이 가실래요?”
“네, 그러죠.”
리카온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따라올 심산이었던 듯했다.
클로가 리카온을 바라보며 못마땅한 듯 으르렁거렸으나, 프레사가 ‘클로 씨.’ 하고 부르자 금세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단순해서 다행이네.’
프레사는 리카온과 클로를 양옆에 끼고 해변을 천천히 걸어갔다.
가벼운 옷차림 탓인지 바닷바람이 고스란히 온몸을 감싸듯 파고들었다.
그 선선하고 깨끗한 공기가 기분 좋아 프레사는 미소 지었다.
“리카온 씨, 전 이 세계가 정말 좋아요.”
처음에는 왜 책 속에서 환생했는지, 왜 하필 악녀 역할인지 알지도 못하는 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이곳은 소중한 이들이 살아서 숨 쉬는 세계, 그들이 늘 행복했으면 하는 그런 세계였다.
리카온이 프레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프레사는 그를 마주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니까 꼭 지키고 싶어요.”
“……네, 나 역시 그렇습니다.”
리카온이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프레사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리카온이 희미하게 그녀를 따라 웃는 그때, 저만치서 익숙한 이들이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아가씨! 이것 보세요! 이렇게나 큰 조개껍데기를 찾았어요!”
“난 바다는 영 별로구나. 역시 숲이 아름답지 않으냐, 레사야.”
“마탑은 차라리 바다 위에 있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그게 훨씬 보안상 안전하니까요. 내 길드도 언젠가 바다로 옮기고 싶군요.”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러 떠났던 이들이 전부 돌아오고 있었다.
프레사는 리카온과 눈을 마주 보았다.
리카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러나 프레사를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프레사는 시선을 들어 다가오는 이들을 응시했다.
‘평화로워.’
로렌이 선물이라며 건넨 조개껍데기의 감촉도, 이따금 바위에 부딪혀 깨어지는 파도의 소리도,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짖어 대는 클로도, 프레사를 쳐다보는 이들의 다정한 시선도 모두 평화롭기만 했다.
어째서 이렇게나 코끝이 찡한 걸까.
마치 이별을 코앞에 둔 사람처럼.
프레사는 소프 가문에서부터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기에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타고난 본성을 바꿀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코테즈 부부의 온화함과 다정함을 프레사가 이어받은 것이 분명했다.
프레사는 이 소중한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으나 그렇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오래도록 계속될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어두운 숲으로 향할 것이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로렌이 그새 프레사의 감정을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프레사는 손으로 코끝을 박박 문지르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로렌. 그냥 즐거워서. 다 모였으니 이제 준비해 온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을까요?”
과할 만큼 따뜻한 가을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