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12화
어슴푸레 동이 트기 전, 프레사와 동료들은 좌표 지정 스크롤을 하나씩 챙긴 후 약제실에 모였다.
떠나기 전, 검은 덩어리 억제제를 나눠주고 다른 약도 챙기기 위해 약제실이 약속 장소로 정해졌다.
다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리카온, 아이작, 제롬, 루이제, 레인, 제드 그리고 클로.
이번 여정에 함께할 이들이었다.
프레사는 그들을 짧게 훑어본 후 작은 유리 약병에 담긴 액체를 나누어 주었다.
“검은 덩어리의 잠식을 잠시 막아주는 약이에요. 약효가 짧으니까 뿌리에 들어가기 직전에 복용해야 해요. 그리고 틈틈이 시간을 확인해서 추가로 마셔야 하고요. 여분도 드릴 테니 다들 잘 챙기세요.”
“약효는 어느 정도 갑니까?”
루이제가 성실하게 손을 들고 질문했다.
마치 선생님과 학생이 된 듯한 기분에 프레사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최소 30분에서 최대 1시간이에요. 급하게 만들다 보니 더 늘릴 시간이 부족했어요. 양해 부탁드려요.”
“그 며칠 사이에 완성했다는 것부터 대단한 일인데요, 뭐.”
아이작이 그답지 않게 프레사를 추켜세웠다.
그러자 조용히 구석 자리에 서 있던 레인이 특유의 연극배우 같은 말투로 받았다.
“그럼요, 그럼요! 스승님께서는 아주 훌륭하십니다!”
프레사는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그들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케이드 씨. 그리고 레인 씨도요. 자, 그럼 다들 준비는 다 끝나셨나요? 아, 그러고 보니 리카온 씨는요?”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는 리카온이 지각이라니.
프레사는 의아하게 제드를 쳐다보았다.
제드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레사 님. 아마도…… 이제 곧 오실 시간입니다.”
“레사, 늦어서 미안합니다.”
제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카온이 저벅저벅 약제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익숙한 이들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프레사는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예의를 갖추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칼리스투스를 제외한 모두가 뒤이어 라우렐을 향해 예의를 갖추었다.
라우렐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배웅 정도는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다들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으니 편하게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등장했는데 편하게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편한 사람은 인간이 아닌 칼리스투스뿐이었다.
그는 황제가 오든 황제 할아버지가 오든 별 관심조차 없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토했다.
“하여튼 인간들 사이의 계급이란 언제 봐도 기이하구나.”
“아, 세계수의 정령님이시군요.”
라우렐이 먼저 칼리스투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칼리스투스는 영 귀찮은 낯이었으나 프레사를 생각해 참는 듯했다.
프레사는 전혀 섞이지 않을 두 사람을 주시하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곳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프레사!”
아이리스가 프레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프레사는 그녀에게 다정히 웃어 보였다.
“아이리스,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준비는 잘 끝났다고 들었지만,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직접 왔어요.”
아이리스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프레사를 바라보았다.
프레사가 억제제를 완성한 후, 리카온이 라우렐에게 보고했다고 듣기는 했지만, 설마 두 사람이 직접 배웅하러 올 줄은 몰랐다.
한편으로는 정말 중요한 일을 하러 떠난다는 사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지금껏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어딘가 두려운,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기분.
“잘 다녀와요. 정원에서 기다릴게요.”
프레사가 아득한 어둠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아이리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프레사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아이리스는 얼굴 위에 가득하던 걱정을 애써 지우고 프레사를 응원하고 있었다.
친구가 되는 데 알고 지낸 시간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건 확실했다.
프레사는 아이리스의 손을 가볍게 꼭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이리스. 디저트도 준비해 갈게요. 역시 레몬 케이크가 좋겠죠?”
“당신이 준비해 오는 거라면 다들 좋아할 거예요. 그게 무엇이든지요.”
아이리스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프레사의 손을 조금 세게 꾹 쥐었다가 놓았다.
“프레사.”
칼리스투스와 인사를 다 나눈 라우렐이 어느새 아이리스의 옆에 서서 프레사를 불렀다.
프레사는 아이리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라우렐이 온화한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은 하는데 적절한 명칭이 필요할 것 같아서 생각해 왔습니다.”
“명칭이요?”
“그래요. 당신이 해낼 일은 ‘칸체르의 역사’에 기록될 테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칸체르의 역사라니.
어쩐지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프레사의 이름이 제국에 대대로 전해진다는 뜻 아닌가?
프레사는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오히려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프레사가 리카온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리카온은 묘하게 재밌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결국 프레사는 리카온의 도움을 받는 대신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폐하, 그건 좀…… 생각을…….”
프레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우렐이 말했다.
“들어 봐요, 프레사. 세계수 원정대, 어떻습니까?”
라우렐이 말을 끝내자마자 여기저기서 나직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황제의 말인지라 선뜻 나서서 반박하는 이가 없었다.
“구리구나.”
칼리스투스만 제외하고.
그 직설적인 말에 프레사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라우렐이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더 적절한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폐하. 지금도 마음에 드는걸요.”
사실 무엇으로 불리든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프레사는 라우렐을 위로했다.
뭐, 어차피 ‘세계수 원정대’는 현재 비밀 조직이나 다름없었으니 칸체르의 역사에 기록된다 해도 한참이나 훗날의 이야기였다.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세계수에 관한 것들은 모조리 비밀이었으니.
만약 실패한다면 역사를 기록할 필요도 없이 세계가 멸망할지도 몰랐다.
다른 방법을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프레사는 이 일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아마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럼 이제 정말 출발할까요?”
프레사는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게 세계수 원정대는 라우렐과 아이리스의 배웅을 받으며 지정 좌표 스크롤을 찢었다.
환한 빛이 약제실을 잠시 맴돌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부디 신께서 도우시기를.”
아이리스가 두 손을 꼭 맞잡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분명 모두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리스.”
라우렐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