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13화
‘저곳이 바로 뿌리의 입구구나.’
프레사는 조금 놀란 눈으로 입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요정들의 마을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할 줄 알았어.’
그곳은 입구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애매했다.
뭐랄까. 우거진 수풀에 가까웠다.
한여름 숲에서 숨바꼭질할 때 가장 숨기 좋은 장소로 손꼽혔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아이작을 제외하고는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묘한 표정이었다.
“저 안은 어, 어떨까?”
가장 뒤쪽에서 클로를 안고 서 있던 제롬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프레사는 그를 힐끔 돌아보고 다시 뿌리의 입구를 응시했다.
“글쎄.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르겠지. 다들 약 복용하세요.”
프레사의 말에 모두가 약병을 열고 약을 들이켰다.
프레사 또한 기이할 만큼 새하얀 액체를 한 번에 삼키고 나서 칼리스투스를 보았다.
“리스 님.”
“……그래.”
칼리스투스는 프레사의 부름에 조금 뒤늦게 반응했다.
아마 그에게 이곳은 특별한 장소일 것이다. 아니, 그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프레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마법사들이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테니.”
“그게 아니라…… 이 안은 세계수의 영역이잖아요.”
“그 정도쯤이야.”
사실 그 정도쯤이 아니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칼리스투스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눈으로 수풀을 응시했다.
프레사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프레사에게 칼리스투스는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 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늘 함께 곁에 있었기에 익숙했고 소중했다.
하지만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칼리스투스는 세계수로 돌아갈 것이다.
미리 작별을 준비해야 할까? 프레사가 멍하니 칼리스투스를 쳐다보며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칼리스투스가 프레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준비하거라, 레사야.”
프레사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리카온 씨, 레인 씨. 시작해요.”
칼리스투스가 가장 앞으로 나섰고 프레사 또한 그 옆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프레사의 옆에는 리카온이, 칼리스투스의 옆에는 레인이 섰다.
칼리스투스가 일시적으로 보호 마법을 마비시키면 리카온과 레인이 이 입구 주변에 다른 보호 마법을 걸 것이다.
프레사는 칼리스투스의 계약자로서 그에게 마력을 나누어주기로 했다.
칼리스투스가 어느 정도 능력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니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프레사는 천천히 심호흡한 후 페도르에게 마력을 나누어줬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시작하마.”
칼리스투스의 말을 신호 삼아 다른 이들은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만약 앞에 선 이들이 잘못되더라도 마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였다.
“왕……!”
제롬이 먹여주는 약을 얌전하게 받아먹은 클로가 프레사를 부르기라도 하듯 짖었다.
동시에 칼리스투스의 손에서 옅은 녹색의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지더니, 수풀을 거칠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왕! 왕! 왕!”
클로가 불안한 듯 연달아 소리 높여 짖었다.
쨍그랑.
마치 깨끗한 유리가 깨어지는 듯 기이하고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났다.
“지금, 지금이다!”
칼리스투스가 소리쳤다.
프레사는 그의 등에 손을 대고 마력을 흘러보냈다.
그가 조금이라도 보호 마법을 해제할 수 있도록, 능력을 전부 써 버리지 않도록 보조해야만 했다.
리카온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강한 보호 마법을 펼쳤다.
그의 머리칼을 닮은 새하얀 보호막이 뿌리의 입구를 둘러쌌다.
레인 또한 작은 보호막을 펼쳐 한 치의 기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틀어막았다.
연습해 오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처음 보여줬던 마법보다 훨씬 정교하고 단단한 보호막이었다.
프레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력이 바닥날지도 모르겠어.’
얼마나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들 안으로 들어가세요!”
프레사가 뒤쪽의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그제야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뿌리 안에 무엇이,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칼리스투스는 균열을 유지해야 했기에 프레사와 함께 마지막에 들어가기로 했다.
아이작과 제드가 가장 먼저 수풀 너머로 사라졌고 다음은 클로와 제롬이었다.
그다음은 보호 마법 유지를 끝낸 레인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뒤따른 루이제였다.
“리카온 씨, 먼저 들어가세요.”
“하지만, 프레사.”
“저쪽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저들에게는 리카온 씨가 필요해요. 저도 곧 갈게요.”
프레사는 단호하게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리카온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프레사의 말을 받아들이고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은 칼리스투스와 프레사 둘뿐이었다.
“프레사, 네가 먼저 들어가거라. 그러면 내가 균열이 닫히기 전에 따라갈 테니.”
칼리스투스의 안색은 창백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계속 닿아 있는 편이 좋겠어요.”
프레사는 칼리스투스의 등에 대고 있던 손을 아래로 움직여 그의 손목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그럼 들어갈게요.”
프레사는 칼리스투스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수풀 너머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런데 그 순간, 찢어질 듯한 비명이 숲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프레사의 몸이 뒤로 확 당겨졌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몸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 같았다.
“프레사!”
리카온이 다급하게 프레사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리카온 씨!”
프레사가 아슬아슬하게 리카온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도무지 리카온이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리카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돼요, 리카온 씨.”
프레사는 그가 마법을 사용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
리카온이 이미 보호 마법을 설치하는 데에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지금 보호막이 유지되는 것 또한 그의 마력이 남아 있기 덕분이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리카온 씨는 마법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안 되는……. 아!”
프레사의 말이 끊어졌다.
그녀를 붙잡은 리카온의 눈동자가 빛났다.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프레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리카온 씨…….”
「감, 히, 혼혈…… 따위가…….」
세계수?
프레사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낯설고 음산했다.
그런데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것 같아 프레사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세계수였다.
“잠깐, 리스 님, 세계수가…….”
“그래. 나도 느꼈다. 너를 반기지 않는 모양이구나.”
칼리스투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에게 화가 났다고 해서 내 계약자를 건드리면 안 되지.”
아니, 칼리스투스는 전혀 차분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점점 빛나더니 마력의 파동이 강해졌다.
거기에 리카온의 마력까지 가세하니 숲이 다시 거세게 흔들렸다.
꼭 숲을 움직이는 세계수와 기 싸움을 하는 모양새였다.
“프, 프레사!”
그 순간 안으로 들어갔던 제롬이 갑자기 뛰쳐나왔다.
“위험합니다!”
뒤이어 루이제가 소리쳤으나 제롬은 이미 수풀 밖으로 반쯤 나온 상태였다.
제롬은 프레사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한때 검을 잡았던 사람이었기에 그의 악력은 만만치 않았다.
“으르릉…….”
그의 품에 있던 클로 역시 프레사의 망토를 입으로 꽉 깨물어 어떻게든 안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리카온과 제롬, 클로가 동시에 프레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거의 다…… 됐다.”
나직이 중얼거린 칼리스투스의 몸에서 맑고 깨끗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프레사를 억지로 끌어당기던 힘이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프레사는 한 손에는 칼리스투스의 손을 잡고, 다른 쪽은 리카온과 제롬에게 맡긴 채 수풀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들이 뿌리로 들어오자마자 수풀이 닫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안쪽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 있던 아이작이 곧장 질문을 던졌다.
프레사는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계수가 우리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 같아요.”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루이제가 드물게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야 겨우 시작인데 벌써 주저앉을 생각은 없었다.
프레사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서 꼿꼿하게 섰다.
하지만 리카온은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불안한 듯이.
“리카온 씨, 괜찮으세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리카온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그를 달래듯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세계수 녀석 여전히 까탈스럽군.”
칼리스투스가 한숨처럼 내쉬며 손을 탁탁 털어냈다.
그 또한 이번 일에 꽤 많은 능력을 소모했을 것이다.
‘이러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큰일인데.’
프레사가 내심 걱정하는데, 아이작이 그들의 대화를 잘라내며 말했다.
“다 괜찮으신 것 같으니 이제 저기를 좀 보십시오.”
아이작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프레사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