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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14화 (114/120)

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14화

아이작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사람들이 숲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요정들은 뾰족한 귀만 제외하면 인간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하지만 그들이 줄줄이 죽은 듯 쓰러진 풍경은 끔찍했다.

프레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뿌리의 요정들이겠군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가려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루이제가 프레사의 팔을 붙잡았다.

“프레사 님, 위험할지도 모르니 제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어요.”

프레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도로 물러섰다.

그리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하긴 세계수의 기운에 붙잡혔던 이는 프레사뿐이었다.

왜 하필 프레사였을까, 고민해 봤으나 칼리스투스의 계약자라는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리스 님은 사랑을 선택했고, 세계수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었지.’

프레사는 힐끔 칼리스투스를 쳐다보았다.

칼리스투스는 입구 옆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서서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조금 전에 세계수와 기 싸움을 하고 난 뒤라서 그런지 유독 피곤해 보였다.

세계수의 방해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늘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들 했지만, 이렇게나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줄이야.

‘심지어 세계수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리카온과 제롬이 아니었다면 칼리스투스와 둘만 뿌리 밖에 남겨질 뻔했다.

‘의외네.’

프레사는 클로를 안고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제롬을 힐끔거렸다.

설마 그 제롬이 프레사를 위해 위험한 밖으로 뛰쳐나올 줄이야.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나중에 고맙다고 말해야겠어.’

아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미처 전하지 못한 인사였다.

“다행히 죽은 건 아닙니다. 그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듯한데…….”

그때 쓰러진 요정들을 살피러 갔던 루이제가 돌아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세계수의 오염 때문인 거겠죠. 일단 챙겨온 약을 전달하고 싶은데……. 케이드 씨, 이곳의 책임자는 어떤 분이신가요?”

프레사는 제드가 들고 있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바라보다가, 아이작을 향해 물었다.

뿌리의 상황이 꽤 충격이었는지 굳어 있던 아이작이 흠칫 놀라 프레사를 마주 보았다.

“아, 장로님이 계십니다. 저쪽으로 가시면…….”

“침입자다!”

그런데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갑자기 어디선가 우르르 뛰쳐나온 요정들이 프레사와 일행들을 향해 날카로운 창과 검 그리고 활을 겨누었다.

분위기가 험악했다.

요정들에게 프레사 일행은 강제로 자신들의 구역을 침입한 인간들일 뿐이었으니 당연했다.

프레사는 일행들과 눈빛을 교환한 다음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저희는 세계수를 도우러 왔어요. 결코 나쁜 의도로 온 게 아닙니다.”

프레사가 차분히 설명하자 다른 일행들도 두 손을 들어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하지만 요정들의 경계는 좀처럼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장로님께 데려갑시다!”

“그냥 여기서 처분해 버리는 건 어때요? 가뜩이나 마을 일로 바쁘신 장로님의 시간을 고작 인간 따위에게 쓰실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장로님께서 아시면…….”

요정들이 수군거리며 의견을 나누었다.

프레사는 굳이 끼어들지 않고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침입자라니, 무슨 일이지요?”

그때 무기를 든 요정들 뒤쪽에서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레사와 일행들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장로님!”

요정들은 빠르게 배열을 정리하더니 목소리의 주인이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그 사이로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요정들이 언급하던 장로였다.

그는 온화한 인상과 달리 냉정한 눈빛으로 프레사와 일행을 훑어보았다.

프레사는 조금 긴장한 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맴도는데, 나무에 기대어 서 있던 칼리스투스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장로야.”

장로의 표정이 순간 흐트러졌다.

그는 칼리스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잠자코 기다리던 칼리스투스가 저벅저벅 걸어와 장로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벌써 나를 잊었느냐.”

장로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크게 뜨고 칼리스투스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칼리스투스 님…… 이십니까?”

그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한 것처럼 느릿느릿 이어진 질문이었다.

장로의 중얼거림에 요정들이 요동쳤다.

“칼리스투스 님?”

“오래전 우리를 떠났다는 정령?”

“진짜야?”

칼리스투스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 듯 장로를 향해 대꾸했다.

“그래. 너는 많이 늙었구나.”

장로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던 요정들조차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꼭 이 뿌리 깊숙한 곳에 머무는 누군가의 입김처럼 시리고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또 이 바람이……. 장로님!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요정 중 한 명이 다급히 소리쳤다.

장로는 놀란 표정을 지우고 침착한 눈빛으로 칼리스투스와 프레사, 그리고 일행을 차례대로 쳐다본 후 말했다.

“일단 제 거처에서 말씀 나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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