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15화
요정족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한 프레사와 일행은 참담한 현실 앞에서 말을 잃었다.
의식을 잃은 아이들의 전신을 새카만 반점이 뒤덮고 있었다.
로렌과 꼬리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타났던 증상이었으나 훨씬 더 심각했다.
세계수 바로 근처의 마을이라서 영향이 더 큰 걸까?
“벌써 이번 주만 몇 명째인지 모르겠군요…….”
“장로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대로 가다간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장로와 함께 온 요정 몇 명이 불안한 얼굴로 연신 말했다.
하지만 장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이들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프레사는 장로가 얼마나 착잡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그 마음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외부에서 이러한 증상을 본 적이 있어요, 장로님. 물론 지금처럼 심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미 외부까지 퍼졌단 말인가요. 이럴 수가.”
장로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흘러나가지 않도록 애를 썼건만.”
“사실 꽤 오래전부터 증상이 나타난 이들을 만났어요.”
프레사는 힐끔 아이작과 리카온을 돌아보았다.
아이작은 직접 검은 덩어리에 잠식되었던 사람이고, 리카온은 라우렐이 그 피해자였다.
장로가 새하얗게 질린 채 물었다.
“그들은 어떻게, 어떻게 됐습니까?”
“다행히 검은 덩어리를 토하고 나았습니다.”
대답한 사람은 아이작이었다.
“그 검은 덩어리의 정체는 뭡니까.”
장로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리카온이 질문을 던졌다.
장로는 리카온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세계수가 오염되면서 흘러나온 일종의 저주 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은 자아가 있어 마력을 갈구하고 체내에 흡수되어 온갖 증상을 일으킵니다. 치료하지 못한다면 최후는…… 모든 마력과 자아를 빼앗긴 채 숨을 거두는 것이지요.”
아이작이 입을 살짝 벌리고 프레사를 쳐다보았다.
프레사가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지금쯤 그러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프레사는 그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고 재차 말했다.
“구토제를 사용해 체외로 유도할 수 있었어요. 없애지는 못했지만요. 하지만 이미 마력 폭주를 일으킨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더라고요.”
프레사는 아이작과 리카온의 증상이 각각 달랐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마력을 타고난 요정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아이작은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그나마 쉬운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우렐은 리스의 능력까지 필요로 했고 그만큼 힘들었다.
‘내가 만난 이들이 전부 세계수의 오염과 연관되었다니.’
시작은 자잘한 갈래였으나 결국은 세계수라는 가장 큰 목적지까지 도달했다.
분명 그 누구도 쓰지 않은 길이었으니 이 길은 온전히 프레사와 동료들의 길인 셈이었다.
프레사는 습관처럼 같은 길로 걸어온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장로가 잠자코 프레사의 설명을 듣고 난 후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렇군요. 요정족 치유사는 방법을 찾지 못해 막막했는데 말이지요. 정보를 주셔서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로와 요정들이 연이어 감사 인사를 하는 바람에 프레사는 머쓱해졌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을 텐데.
프레사는 제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드는 눈치 빠르게 들고 있던 주머니를 프레사에게 건네주었다.
프레사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후 가죽 주머니 안을 한번 살폈다.
처음부터 뿌리의 요정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져온 약이었다.
“이건 복용할 수 있는 약이에요, 장로님. 쓰러진 요정들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요.”
약에 문제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프레사는 주머니를 장로에게 건네주었다.
장로가 눈을 크게 뜨며 프레사와 칼리스투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것까지 주시다니…….”
“버텨 주셔서 감사해요, 장로님.”
프레사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요정들이 지금껏 버텨 주었기에 그녀의 세계가 그나마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으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칼리스투스 님의 계약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인간은 아니신 것 같군요.”
연거푸 고맙다고 말한 장로가 프레사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프레사는 그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버지께서 요정이에요. 페도르 코테즈라고 꼬리에 살고 계세요.”
“페도르라면…… 몇 해 전 딸을 잃고 돌아온……. 당신이 그 잃어버렸던 딸인가 보군요.”
장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요정족은 오랜 세월을 사는 만큼 같은 종족에게도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만큼 프레사 납치 사건이 큰일이었겠지만.
그의 눈가 주름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프레사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정말 다행이군요. 페도르와 샤를이 무척 기뻐했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도요.”
“……네, 감사해요.”
프레사는 자연스럽게 코테즈 부부를 떠올렸다가 금세 지워냈다.
지금은 이런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이들이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늦기 전에 세계수로 가야 한다.”
다행히 칼리스투스가 본론을 불쑥 꺼냈다.
장로는 프레사를 향해 있던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럼 이제 돌아가시는 거지요?”
“……그래.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으니.”
칼리스투스는 높낮이 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가 돌아올 곳이라면 한 군데뿐이었다.
바로 세계수, 이곳까지 온 이들의 종착지였다.
좁은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장로가 기도하듯 두 손을 꼭 모으며 작게 속삭였다.
“부디 괴롭지만은 않은 재회가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칼리스투스 님.”
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