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17화
클로는 용감하게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중간중간 검은 덩어리 억제제를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걷기만 했다.
그 뒤를 따르는 제롬과 레인은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레인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요, 클로.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는 거 아닙니까?”
“왕?”
클로가 슬쩍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레인이 주먹을 들어 올리며 화를 냈다.
“뭘 순진한 얼굴입니까! 이거 순 사기꾼 아니냐고요!”
“끼잉…….”
클로는 제 편을 들어 줄 제롬의 다리 옆으로 뛰어가더니 눈치를 봤다.
제롬이 미간을 찌푸리며 레인을 응시했다.
“그만해. 지금 길 찾느라 클로도 힘들잖아.”
레인은 주먹을 꽉 쥐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늑대인간일 때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은 더 짜증나는군요. 그래요, 그래. 어디까지 가는지 봅시다!”
“으르릉…….”
굉장히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였다.
레인은 황당한 얼굴로 클로를 바라보았다.
“알겠다는데 왜 화를 냅니까?”
“……조용히 해. 클로가 그런 거 아니니까.”
나지막하게 대답한 사람은 제롬이었다.
클로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레인은 이 황당한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레인은 곧 그들의 앞을 막아선 세 마리의 거대한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안광은 피보다 더 붉은 빛으로 번뜩였다. 그냥 늑대가 아니라 이 숲의 마물이었다.
상황을 인지한 레인의 눈빛이 빠르게 차분해졌다.
“……확실히 클로보다는 덩치가 크군요. 어쩐지 목소리도 남다르더라니.”
“조용히 지나갈 수는 없겠지?”
제롬이 달칵, 검집을 밀어 열며 조용히 물었다.
레인의 양손에서 붉은 불빛이 피어올랐다.
“그랬다면 저렇게 막고 있지 않았겠죠! 순진한 소리 하시긴!”
레인은 망설이지 않고 불꽃을 늑대 무리에게 내던졌다.
그것을 신호 삼아 전투가 시작되었다.
제롬은 날카롭고 매끈한 검을 휘둘렀고, 클로 역시 그를 보조하며 늑대와 맞부딪쳤다.
하지만 클로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약했다. 거대한 늑대들에 비하면 하룻강아지나 다름없었다.
제롬은 그를 신경 쓰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고, 생각 없이 날뛰는 사람은 레인뿐이었다.
“그렇게 피하기만 하다간 죽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
제롬은 인상을 찡그리며 검을 크게 휘둘러 달려드는 늑대를 베었다.
하지만 늑대는 그의 검을 피하더니 순식간에 등 뒤로 움직였다.
“젠장!”
제롬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
클로가 제롬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다른 늑대의 앞발에 맞고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제롬은 차라리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클로! 프레사에게 가! 어서!”
“낑…….”
클로가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은 클로에게 달려드는 늑대를 막아서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빨리 가!”
클로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곤 빠르게 달려갔다.
늑대 하나가 그를 쫓아가기 위해 움직였고, 제롬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몸으로 늑대를 막아섰다.
‘늦었……!’
제롬이 간신히 검을 가로로 세우면서도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 바로 옆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들어 늑대를 타격했다.
“하여튼 어지간히 손이 많이 가는군요!”
“……고마워.”
제롬은 머쓱하게 고마워했다.
레인이 다시 마법을 펼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심하긴 이릅니다! 이 녀석들, 영 마법이 통하지를 않네요.”
그의 말처럼 잠시 바닥에 엎어졌던 늑대들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불의 마법에 당했으니 원래라면 활활 타서 재가 되었어야 정상이었다.
레인은 초조하게 불꽃을 지폈다.
‘이러다간 마력이 바닥날 텐데.’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늑대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늑대들은 좀처럼 지치지를 않는데 제롬과 레인은 점점 힘들어졌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불리한 싸움이었다.
“제길…….”
레인의 마력은 이제 슬슬 한계였다.
애초에 마법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적에게 수십, 수백 번이나 퍼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레인이 잠시 숨을 헐떡이며 마법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늑대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
“레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늑대를 상대하던 제롬이 레인을 불렀으나 거기까지 가기에는 무리였다.
레인의 위로 무겁고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 돼, 여기서 실패할 수는…….’
레인은 어린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렇게 무너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레인은 남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챙!
그는 불을 피우는 대신 미친 듯이 연습했던 보호 마법을 전개했다.
늑대의 날카로운 발톱이 보호막 위를 공격했다.
한 번은 겨우 막았으나 보호막은 계속되는 늑대의 공격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늑대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순간.
쉬익! 퍽!
“여기서 만나서 다행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날카로운 검날로 늑대의 몸을 베며 나타난 이는 제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