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만 118화
이미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세계수…….”
프레사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혼혈 계약자를 데리고, 돌아와?」
“……그래. 나도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어느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칼리스투스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그의 짙은 녹색 머리카락이 바닥까지 내려와 파도치듯 넘실거렸다.
프레사는 침묵했다. 둘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화로 해결되면 좋겠지만…….’
「유감스럽지만, 칼리스투스. 나는 너를 내 손으로 죽일 날만 기다렸어.」
세계수는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프레사는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잠깐, 세계수님…….”
「감히 나를, 부르지 마!」
세계수가 소리를 지르자 거센 바람이 불어와 공간을 뒤흔들었다.
프레사는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바라보았다 넝쿨만 가득하던 곳에 거대한 뿌리가 솟아 있었다.
“당신이 세계수…….”
“아니. 저건 진짜가 아니다.”
칼리스투스가 나직이 말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뿐이지.”
프레사는 의아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수는 나무가 아닌가요?”
“명칭만 나무일 뿐, 실제 모습은 아니야.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나무가 맞지.”
칼리스투스가 시선을 돌려 세계수의 몸통을 응시했다. 프레사 또한 그가 바라보는 곳을 응시했다.
칼리스투스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어렴풋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세계수의 진짜 모습은 뭐지?
「……칼리스투스.」
세계수의 목소리는 뾰족한 돌로 벽을 긁는 것처럼 기이했다.
칼리스투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대화를 좀 하자꾸나.”
「이제 와, 대화? 너도 참, 뻔뻔한 건, 여전해.」
“사과하고 싶다.”
「…….」
세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프레사는 직감했다.
칼리스투스의 태도는 이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물론 그가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상황을 대화로 잘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리스 님, 다정하게 구세요.”
“……지금도 충분히 애쓰고 있다만.”
“제가 듣기에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난 노력한 거다, 레사야. 애초에 저 녀석이 삐딱하게 나오지 않았더냐.”
칼리스투스는 여전히 불퉁할 뿐이었다.
프레사가 초조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세계수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를 두고, 속닥거리지 마!」
“그럼 네가 나와 제대로 대화하면 될 일이다.”
「나는 너를, 죽일 거야.」
“그럼 죽이거라.”
「……뭐?」
이번에는 프레사도 당황했다.
칼리스투스의 말투는 너무 담담하고 차분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나를 죽여서 네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다.”
세계수는 꽤 오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프레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녀의 손은 언제든 마도구와 약을 꺼낼 수 있도록 약주머니 근처를 맴돌았다.
잠시 후 세계수가 여전히 끽끽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변했구나.」
칼리스투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 위로 빛이 어렸다.
“……그래. 소중한 것이 생겼거든.”
「이미, 그건, 오래전에, 죽었으면서.」
“아니. 지금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칼리스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프레사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하는 ‘소중한 것’이 프레사를 가리킨다는 것을 세계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너에게, 소중한 것을…… 없애면, 돼.」
세계수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프레사는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선가 나타난 어린아이가 프레사의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안녕.」
소년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반가움이 아닌 작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프레사가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 소년이 한 뼘 더 가까워졌다.
작은 체구와 다르게 엄청난 위압감이 프레사를 향해 쏟아졌다.
프레사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소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안 되지.”
소리도 없이 칼리스투스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
아이가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소년은 어느새 칼리스투스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세계수가.
칼리스투스는 그의 뒷덜미를 꽉 붙잡은 채 속삭였다.
“내 계약자를 해치면 가만두지 않겠다, 파르팔라.”
「너, 설마…….」
세계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칼리스투스가 자신을 잡을 줄 몰랐던 듯 당황한 눈치였다.
“능력이 전부 돌아왔느냐고? 그야 당연하지.”
칼리스투스가 미소 지었다.
“너와 나는 세계를 공유하는 사이이니. 함께 있으면 강해지는 건 너도 알지 않았느냐.”
「너 같은, 쓰레기가! 세계와 나를 포기하고, 인간을 선택한, 쓰레기!」
파르팔라의 분노가 공간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두 사람 사이로 환한 빛이 휘몰아쳤다.
프레사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이 빛을 정면으로 봤다가는 시력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용서…… 못 해!」
세계수, 파르팔라가 거칠게 저항했다.
칼리스투스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쿨럭……!”
그가 기침하자 입술 틈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프레사는 눈을 뜨지 못하니 무슨 상황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리스 님!”
“눈을 감거라!”
칼리스투스가 프레사를 향해 강하게 소리쳤다.
「정말 웃기지도, 않구나…….」
바득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프레사를 향해 굵은 나무줄기가 날아왔다.
프레사는 허공을 후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레사야!”
칼리스투스가 다급히 프레사를 불렀다.
프레사의 바로 눈앞에 세계수의 줄기가 있었다.
그것은 생명의 상징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그녀를 후려칠 것처럼 위협적인 형태였다.
여전히 사방에 빛이 넘쳤으나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눈을 감으면 위험했으니 버텨야만 했다.
약주머니에서 약을 하나 꺼내려는 순간, 무언가 위로 통 튀어 오르더니 프레사의 시야를 막아섰다.
“왕!”
새빨간 털을 지닌 작고 귀여운, 소중한 존재였다.
프레사는 이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그 이름을.
“클로 씨!”
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클로의 작은 몸이 허공을 날아갔다.
프레사가 다급히 손을 뻗었으나 클로는 이미 저만치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크, 클로 씨!”
프레사는 허둥지둥 클로에게 다가갔다. 클로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안 돼…….”
프레사는 클로의 숨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작은 코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곁에서 잠들 때마다 쌕쌕거리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 돼, 안 돼요. 클로 씨…….”
프레사는 어쩔 줄 몰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주머니를 뒤적였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프레사는 죽은 이를 살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약사지, 의사가 아니었다.
배운 것을 떠올려 심장 마사지를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세계수의 가지에 맞고 죽은 이를 살리는 방법이 존재할까?
이토록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때, 프레사를 노린 세계수의 줄기가 다시 날아들었다.
프레사는 눈을 크게 떴다.
쩍!
순간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더니 프레사를 향하던 줄기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레사.”
저벅, 저벅.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찢어진 새하얀 망토가 바람을 타고 가볍게 흔들렸다.
그가 프레사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늦어서 미안.”
“리카온 씨…….”
프레사는 간신히 감정을 다잡았다.
리카온은 클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레사는 그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클로는 마탑의 사람이었다.
평소에 티격태격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아니었다.
리카온은 프레사와 클로 앞에 한쪽 무릎을 낮춰 앉았다. 그리고 프레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더니, 그녀의 볼을 감싸듯 쥐었다.
“쉬고 있어요. 금방 돌아올 테니.”
프레사는 리카온이 이렇게 말하고 떠날 때마다 얼마나 일찍 돌아왔는지 또렷이 기억했다.
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리카온 씨…….”
프레사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제 볼을 감싼 리카온의 손을 꼭 붙잡았다.
“클로를 부탁합니다.”
리카온은 다정하게 프레사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프레사가 붙잡기도 전에 칼리스투스와 대치 중인 파르팔라를 향해 걸어갔다.
프레사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곧 정신을 다잡았다.
어차피 프레사가 저들 사이에 낄 수는 없었다.
지금처럼 방해만 될 뿐이었다.
게다가 리카온이 그녀에게 클로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프레사의 머릿속을 스친 방법이 하나 있었다.
“살릴 수 있어.”
프레사는 그새 차분해진 눈으로 아까 리카온이 잘라 낸 세계수의 가지를 응시했다.
세계수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그것은 꺾이거나 죽은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